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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보 Jan 20. 2021

예보일기_05

저스트 댄스 2021

문뜩 사는 게 뭘까 싶은 순간이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보니 챗바퀴에 갇힌 햄스터처럼 하염없이 달려야 하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답답하다. 하지만 세상에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70억 명이나 더 있다 보니 ‘우울감’이라는 단어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코로나 시대에 직장은 어느 때 보다 더 소중하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면서 ‘힘들다’고 말하기 더 어려워졌다.


‘따박따박 월급을 받으면서 힘들면 뭐가 그리 힘들다고.’


직장인 남편을 바라보며 한 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었다.


맞벌이 신혼부부 7개월 차. 삶에 색이 있다면 베이비 핑크 색일 것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디핑크로 탁해진 일상을 버티고 있다. 그렇다고 사랑이 식은 건 아니다.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뜨겁게 싸울 뿐.


흥미롭게도 남편과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들으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다.


“너네가 화를 낸다고?”


남편과 나는 모두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되어서일까? 그동안 참아온 모든 분노를 쏟아내듯이 싸우는 순간이 잦아졌다.


최근에 싸움이 심각해진 기점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기관이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어이없는 상황에 놓인 후부터였다. 혹자는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정해진 것은 없고 소문만 무성한 직장의 존폐위기는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예민한 성격 때문에 원체 보유량이 적은 ‘여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올해 목표였던 ‘여유를 갖고 살기’는 첫 달부터 망할 판이 만들어졌다. 망할.


딱히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위기 속에서 우리를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저스트 댄스’였다. 저스트 댄스 2021. 화면에 따라 춤을 추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이야기가 맞다.


4만 8천6백 원으로 할인 중인 ‘저스트 댄스 2021’과 추가로 4800원을 결제하고 언리미티드 회원권을 끊었다. 그리고 같이 설거지를 누가 할지를 두고 댄스 배틀을 펼쳤다. 2곡을 추고 나니 체력이 방전되어 둘 다 소파에 널브러졌다. 처음 보는 보호자의 기괴한 몸짓에 신이 난 밀리(우리 집 반려견)가 훼방을 놔준 덕분에 가뿐히 2연승을 손에 거머쥐었다.


이 날은 싸우지 않았다.


운동에 근접한 신체 활동을 한 게 얼마만인지, 이렇게 역동적인 저녁을 보낸 게 얼마만인지, 소파에 널브러져서 창가에서 열기를 식히는 남편을 찬찬히 바라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 박자 쉬고 보니 다시 남편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남편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지만 사람이기에 지칠 수밖에 없고 힘든 순간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힘듬에 빠져 나는 오빠가 ‘사람’이 아닌 ‘슈퍼맨’이 되길 요구했던 것이다. 오빠가 만약 진짜 슈퍼맨이었다면 아무리 몸이 좋고 힘이 세도 레깅스 위에 삼각팬티를 입은 모습에 기겁할 거면서 말이다.


힘든 것은 나약한 게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힘든 부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공유할 수 있는 게 정말 대단히 용감한 일인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여유롭게 출근해서 카톡을 보냈다.


오늘도 쉽지 않은 이른 아침에 총총 나가는 나에게 따듯하고 멋진 웃음을 지어줘서 고맙다고,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고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향한 오빠가 너무 멋지다고, 사랑한다고.


감동받았다는 답장과 함께 오빠는 어제 같이 춤춰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래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댄스 한 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폭풍 속에서도 춤 한 곡 정도는 함께 출 수 있는 여유만 있어도 우리는 괜찮지 않을까?


Just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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