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행복한 자녀로 키우는 멘토 부모 - 송지희
요즘 다시 짜증과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그 화살은 아이를 향하며 너 때문에 활시위를 당긴다는 헛소리를 정성스럽게도 지껄인다. 12월, 1월의 극단으로 치닫기 전의 전조증상과 오버랩이 된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경험의 힘인지 인지의 힘인지 알아채서 다행인 반면,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아 불행이다.
가식적인 것. 멈추지 않아 불행이라고? 멈추기 싫어서 브레이크를 고장 낸 건 아니고? 이 욱하는 거 아들한테 그대로 물려줄 거니?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줄어든 시간의 배만큼 엄마의 초조함이 늘어났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아이가 밥을 안 먹어서, 학교에 늦을 거 같아서, 학원도 안 다니는데 학업을 따라가지 못할까 봐, 저런 행동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학교에서는 잘하고 있는 건지. 이 모든 불안은 나의 불안이다. 내 주관적인 생각이고, 기준이고, 눈높이다. 이중에 오롯이 아이를 위한 건 얼마나 될까.
줄어든 시간을 채워야 하니 잠자는 시간이 늦어진다. 힘들게 일어나며 "으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기상을 하고 그 소리는 내 신경질 세포를 자극한다. 아침에 입맛이 별로 없는 아이를 위해 밥을 차린다.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시간을 체크하면서 내어준 음식이 도통 비워지질 않는다. 숟가락을 잡아야 하는 손은 큐브를 만지작 거린다. 주변을 맴돌며 "지금 밥 먹고 있는 거지?" 라며 2번의 경고를 보내고 3번째 큐브 돌아가는 소리에 결국 아침부터 참고 누르던 화가 폭발했다.
소리를 지르고 큐브를 다 부숴버리겠다는 협박을 한다. "엄마 짜증 내지 않겠다며. 약속은 지켜줘"라는 아이에게 "너부터 약속 지켜! 엄마가 지금 괜히 혼내는 거야? 그저께도 혼났지! 도대체 왜 그래! 엄마가 너 큐브 만지는 거 모르는 줄 알아? 왜 좋게 말할 때 안 듣고 소리를 질러야 말을 들어! 너 때문에 내가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기분 나빠야 하는데?" 그리고 글로 담지 못할 만큼 수없이 많은 힐난을 쏟아부었다. '지금 밥 먹고 있지?'라는 질문이 큐브를 만지지 말라는 말인 줄 몰랐다며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학교에 갔다.
학교를 보내놓고 마음보다는 목이 아프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엄마가 되자고 다짐을 한 지 24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밥 먹으며 종이접기를 해서 한바탕 혼을 낸 것이 이틀 전이다. 아이는 다시는 밥 먹으며 딴짓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며 엄마에게도 약속을 원했다. 짜증과 화를 내지 말아 달라는 말에 그래보마 대답을 했다.
어제는 일찍 일어나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어서인지 맛있게 잘 먹었고, 그 모습이 예뻐 웃으며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아이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반달눈으로 귀엽게 웃는다.
"우리 애기, 왜 이렇게 귀엽게 웃어?"
"엄마가 귀엽게 웃으니까 그렇지. 엄마 보고 따라 웃은 거야."
무언가가 뒤통수를 후드려 친 거 같다.
나는 너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데 너는 나를 보며 웃는다고 하는구나.
나는 너에게 눈물을 주었는데 너는 나에게 웃음을 주는구나.
미안해.
엄마가 더 좋은 사람이 될게.
10대 치기 어린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순간이라고 하기엔 짧지 않다.
술에 취해 양복을 입은 채로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아빠와 식탁에 앉아 있는 딸. 빨개진 눈으로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아빠와 기어이 쳐다보지 않는 딸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이야기 좀 하자는 아빠의 말과 싫다는 딸의 말은 허공에 부딪친다. 언제부터 인지, 왜인지 콕 집을 수는 없다. 모든 이유로 아빠를 거부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빠와 마주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아빠의 잔소리가 너무 싫어 피하고 싶었다. 많이 웃어주는 만큼 자주 욱하고, 칭찬보다는 꾸지람을 하는 아빠가 미웠다. 점점 아빠의 좋은 모습도 외면하게 됐다.
그날도 아빠의 불만 어린 시선에 화가 난 딸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불만을 품은 건 딸이었고 아빠의 눈은 애절함이다. 술에 취해 들어온 아빠에게 따뜻하게 "오셨어요?" 이 말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그랬다면 우린 마주 보고 웃었을까? 그날만의 기류는 아니었기에 쉽지 않았겠다. 아빠는 나에게 불편이었다.
우리 내면에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고 한다. 어떤 심리학자 그것을 '내면아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도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에서 심리적 상처가 많은 사람은 내면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한다. '마음속 아이'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유년기의 상처나 심리적 갈등을 말한다.
삶이 답답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 특히 자식 키우는 일이 힘들고 괴롭다고 느낀다면 내 마음속 어린아이를 찾아야 한다. 내면아이를 찾아내지 못하면 평생 상처받은 아이 상태로 인간관계를 맺게 되고 자식한테는 더 큰 상처를 대물림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되더니 아빠의 모습을 아이에게 완벽하게 재연하고 있다. 오스카에 재연배우상이 있다면 그 트로피는 따놓은 당상이다. 우리의 모습을 나만? 내가 아빠를 따라 한다면 나의 아이는? 트로피 후보로 거론되는 라이벌은 분명 나를 빼다 박은 아이일 거다. 집안 거실장에 오스카와 깐느 트로피를 나란히 놓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아이가 나를 외면할까 봐, 아빠와의 짜증이 깔려있던 관계를 답습할까 봐 두렵다. 머지않은 시간 안에 소파에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를 내 아이가 투명인간 취급할까 봐 몸서리치게 무섭다. "엄마, 짜증 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이 말조차 건네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 온전히 살 수 있을까.
가까운 사람에게 지나치게 화를 낸다면 내 안에 있는 화가 무엇인지 살핀다. 특히 부모한테서 억울한 일을 당한 경험을 떠올려 나를 위로하고 용서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분노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 가족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분명 아빠도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사춘기 딸이 알 수 없었듯이 내 아이 역시 나의 내면아이를 알아주고 이해해주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해야 할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의 내면아이였다. 어디까지 거슬러 가야 할지, 어떻게 만나야 할지, 만나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롯이 나의 상처를 마주하기가 두렵다. 하지만 내 안에 성난 아이를 하루빨리 만나야 할거 같다. 마음속 아이를 만나면 무시하지 말고 마음을 따라가라면 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본다.
어른이 된 내가 마음속 어린 나에게 엄마처럼 보살피고 사랑하자. 그리하여 내면이 충분히 성숙하고 힘이 생기면 부모로서 자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며칠 후 잠자리 대화...
나 "아이가 나 닮으면 어떡하지?"
신랑 "자기가 잘 지내봐"
넌 같이 안 살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