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20분에 신랑밥을 차립니다

세상 모든 부부는 행복하라 - 김홍식

by 사리

가화만사성 家和萬事成 결혼식 주례사 단골손님 되시겠다. 분명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덕담일 텐데, 나는 왜 이렇게 가정에서 화를 내면서 만사에 화를 내고 사는 걸까.

태교의 아름다운 시기가 지나고 경이로운 출산을 따라온 산후우울증은 나보다 신랑을 더 힘들게 했다. 신랑이 와야 씻을 수 있었고, 모든 집안일은 신랑의 손을 거쳤기에 하루종일 신랑을 기다렸다. 기다린 만큼 반가운 게 아니라 탓을 했더라. 노력하는 그를 알지만, 나와 아이를 돌보기만도 힘들어 솟구치는 짜증과 화를 참을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점점 산후우울증이 변이 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니 가장 큰 피해자는 두말할 것 없이 신랑이다. 아니 어찌 보면 내가 제일 불쌍하다. 원래 안 그랬는데. 진짜? 그건 모르겠고, 가화家火가 되기 전에 정신 좀 차려보자.

작년 결혼 1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신혼의 달달함으로' 캐치 프레이즈를 내세웠지만 한 달을 못 넘겼다. 그러다 보니 조울증처럼 뛰는 널 위에서 신랑은 내려가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아등바등 버틴다. 흡사 기능을 다해 처분을 기다리는 마리오네트가 그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거리 발령이 나서 6킬로 거리 출근길 대신 130킬로를 가야 하니 이대로는 안 되겠더라.

자기야,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챙겨줄게!

장거리 출근 2주일 전부터 공약 남발하듯 눈 마주칠 때마다 너의 아침은 내가 책임지마고 이야기를 했다. 결혼 후 출근길 아침밥을 차려준 적이 없고, 퇴사 후 신랑이 근거리 출근할 때도 출근 준비 내내 잠만 자던 야행성 아내를 믿지 못하지만 말만으로도 좋아하는 게 보인다. 장거리 첫 출근 전날, 내일 새벽에 밥 차려준다는 말에도 그냥 자라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시점에 장거리 출근 첫날, 내가 깨웠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고합니다! 고한김에 만천뷰 넘어라!

솔직히 그 후로 매일 아침을 차려주지는 못했지만 되도록이면 5시 20분에 같이 일어나서 먹을 거 하나라도 챙겨주려 한다. 거실에 놓인 식탁 겸 책상에서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생기니 집에 가화家和가 생기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씻으러 들어간 욕실에서 물소리를 뚫고 노래가 들리니 이 또한 가화歌花가 싹텄다고 할 수 있겠다.




신혼시절 구매했던 책이 있다. '세상 모든 부부는 행복하라'의 부제는 평생 신혼을 꿈꾸는 부부를 위한 행복학 개론이다. 이 책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신랑한테 보고 좀 잘하라고 샀던 책이었다. 아마 공처가, 애처가, 미쳐가에 대한 정의 때문이었던 거 같다. 뭐가 됐든, 결혼 10주년의 캐치 프레이즈와 일맥상통한 듯하여 다시 꺼내 보았다.

프롤로그의 끝에 있는 이 글을 다시 읽는데 의문이 들었다. 우리 신랑은 분명 애처가와 공처가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 걸까?


프롤로그와 챕터 1에서 강조하는 타이틀은 꽃 한 송이, 밥 한 그릇이다.

여자는 꽃 한 송이로 행복하고, 남자는 밥 한 그릇에 감동합니다.
남자는 배부르면 행복하고, 여자는 꽃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인생에는 밥도 필요하고 꽃도 필요합니다.

내가 느끼기에 꽤 고리타분한 말이고 나와는 너무 달라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는 꽃 자체는 좋아하지만 꽃 선물은 선호하지 않는다. 매일 물을 갈아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매번 우리 집 꽃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받았을 때는 행복하다. 그렇다면 내가 신랑에게 새벽에 차려주는 밥도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신랑의 콧노래가 샤워기 물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게 아닐까?


아내가 정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대상은 새로 산 신발이나 명품 가방이 아닙니다. 가방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아끼던 콜드크림을 듬뿍 바르고도 상처가 날까 살살 문지르듯 남편을 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거칠게 다뤄도 저녁마다 집으로 들어오니까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친 남자의 가슴속엔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여린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직장 다니던 맞벌이 시절, 신랑이 나를 위해서 밥을 차려준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신랑의 아침을 차려준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님이 차려주셨고 결혼 후에도 혼자서 잘 챙겨 먹고 다녔다. 아이를 기르며 어떻게든 먹이기 위해 매일 아침을 차려주듯이 신랑에게 아침밥상을 내어주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예전엔 총칼을 들고 싸워지만 지금은 사무용품과 전화와 인터넷으로 전쟁을 치릅니다. 출근이 전쟁이고 근무도 퇴근도 전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총칼을 막아내는 것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남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매일 전쟁터로 떠나는 신랑에게 밥 한 그릇 차려주는 의미를 찾았다. 나는 신랑을 매일 구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는 나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간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아직은 습관이 안 돼서 매일 밥상을 차려주지 못하지만, 사실 이 글을 쓰는 아침도 혼자 차려먹고 전쟁터로 나갔지만, 언젠가는 매일 내가 챙겨주는 밥을 방패와 무기 삼아 승리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 나도 잔소리 좀 당당하게 하지 않을까.



며칠 후 잠자리 대화...
나 "자기야, 내일 새벽 5시에 밥 예약해 놨어. 자기 좋아하는 콩밥이야"
신랑 "히히 나 내일 감옥 가네"
웃으며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니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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