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행의 이유 - 김영하
바쁜 직장 생활을 하던 나에게 여행은 숨통이자 취미였다. 취미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은 모르겠지만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여행'이라고 대답했다. 여행이 취미가 되려면 얼마나 자주 가야 할까? 직장에 메인 몸이 매년 3번은 비행기를 탔으니 이 정도면 취미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나보다 더 많이 가도, 적게 가도 취미가 여행인 사람은 존재한다. 코로나로 평범이 파괴되었을 때, 사람들은 예전의 일상을 바라는 만큼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나 역시 마지막 여행을 곱씹으며 숨통이 트이길 바랐다. 무너진 일상은 대체할 방법을 찾으며 적응하고 살겠지만 여행은 방법이 없었다. 집에서 치킨과 맥주를 배달시켜 영화를 보듯이 갈 수 있는 게 여행은 아니지 않나. 비행기는커녕 국내에서 우리 가족 셋 맘 편히 다니기도 힘들었다.
여행 가고 싶어 죽겠어
사실 내가 이 여행못가병을 앓기 시작 건 코로나 시국은 아니다. 결혼한 이듬해 신랑 스케줄에 맞춰야 해서 시작된 이 병은 그나마 출산을 하며 앓을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좀 자라자 국내 여행부터 다니며 멀리 갈만하다 싶었는데 역병에 길이 막혔다.
암흑기가 지나고 드디어 작년, 아이 여름방학 때 비행기를 탔다. 인천대교를 건너는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면세점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열흘을 놀다 왔고, 다음 여행을 준비 중이다. 어머님 칠순 여행을 가며 친정 식구들과 날짜를 붙여서 떠나는 2주간의 여행이 한 달도 안 남았다. 비행기와 숙소만 해놓고 아무런 준비도 안 했지만 여행 그 자체로 행복하다.
봄에 계획한 여행이 있기에 긴 겨울방학 동안 또 여행을 가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금전적으로도 무리였고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했다. 아이의 방학과는 상관없이 내가 너무 바빴다. 성숙해지고 싶은 갈망에 나를 돌아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며 여행은커녕 외출도 안 하고 거의 집에서만 지냈다. 매일 읽고 쓰는 엄마 옆에서 아이 역시 읽고 쓰고 종이 접기와 큐브를 하며 보냈다. 여름방학 때는 체험학습으로 돌아다니기 바빴다면 겨울 방학 외출은 예체능 학원과 서점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방학을 끝내려니 아이에게 미안했다. 개학 직전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주고자 뮤지컬을 예매하고 광화문광장과 교보문고에서 놀 계획을 세웠다. 당일 오전 갑자기 생긴 일정 때문에 겨우 공연 시간에 맞췄고 점심 먹은 후 광화문광장에서 잠깐 놀고 카페에 들러 지하철을 타고 온 것이 다였다. 시간에 쫓겨 출발한 반나절의 짧은 외출이었지만, 계획한 일들은 반도 못했지만, 어느 여행보다 즐거웠고 기억에 남는다. 지하철에서 나란히 앉아 책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행복한 여행이었다. 조만간 아이와 다시 오자는 약속도 하고 다른 곳에 가서 추억을 쌓자 다짐도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여행일까?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한 달간 '내 방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2달간 집에 머무르며 성숙해지고 싶어진 나를 돌아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쓴 시간도 혼자만의 여행은 아니었을까.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어서 몸부림치며 보내는 시간이 쉽고 즐겁기보다는 후회와 깨짐의 반복이었다. 내가 정말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는지 매일 수십 번씩 넘어지고 포기하고 싶었다. 만약, 성숙에 다다르는 이 과정이 여행이라면 조금은 더 기대하며 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현재라. 나는 현재 성숙한 어른이 되길 바란다. 그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변하고 싶다. 여행을 떠나며 얻게 될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것과 닿아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나에게 여행의 이유로 충분하다.
김영하 작가처럼 유일하며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성숙한 어른을 넘어 더 멋진 무언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겠다. 만약 실패한다 해도 시작한 곳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일상을 여행으로 만든다면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깨지지만 깨달음이 있고 그 안에서 즐거움이 더 커질 거 같다. 그러니 매일을 여행같이 살고 싶어졌다.
그러다 좀 지치고 힘들면... 진짜 여행을 가면 되지!
며칠 후 잠자리 대화...
나 "내가 맨날 여행 다니면 어떨 거 같아?"
신랑 "맨날?"
나 "응"
신랑 "안 돼. 날 두고 어딜 맨날 가"
그럼 같이 가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