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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Sep 21. 2022

당연하게

잠을 자야 잠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뜬 눈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아질수록 잠은 잠 속으로 숨는 일이 많아졌다


기차는 다음 역을 지나야 종착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승객들은 종착역을 향하는 각기 다른 다음 역을 지나갔다


어떤 사실은 당연한데도 당연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거스르려는 사람처럼


잠을 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기차를 타지 않고도 종착역에 다다르길 바랬다


나는 당연한 사람처럼 당신 앞에 앉아 있다가

당연한 사람처럼 당연한 대답을 골라 답했다


나도, 그래, 라는 대답은 쉬웠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어긋나는 일이었다


기차를 타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종착역인 듯하여 내렸으나

종착역은 아니었다


종착역은 몇 개 역을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냥 걷고 싶어서 걷기 시작했다

결함과 실수가 어깨를 짓눌렀다


당연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일은

실패와 실패 사이를 걷는 일 같았다


종착역은 보이지 않았고

길이 맞는지 물어보았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도 무언가를 빚진 사람처럼 자신이 없어 보였다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이미 도착해 있었을까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카페인에 약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술 한잔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술잔을 드는 날은 줄어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었을 때

할 말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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