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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Dec 29. 2022

계란말이 철학

계란을 말다가 생채기가 생겼다

노란 액체가 상처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뒤집개를 움직여 둘둘 말아 놓으니

감쪽같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있었으나 없는 것처럼

있었는지도 모르게

뒤집개만이 기억하는 순간의 일이 되었다


계란말이를 접시에 썰어놓는다

아무렇지 않게 집어든 계란말이의 단면

켜켜이 달팽이집처럼 말린 모양을 바라본다


나무에 나이테가 늘어나듯

송진이 흘러나오듯

겹겹의 시간 속에 상처와 치유가 말려 있다


한 입 베어 물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단단한 물성

계란물에 그제의 나를 풀어 어제의 나를 감싸고

오늘의 나로 말아 놓는다


- 2022.4.13 두 번째 합평 모임 시


시 합평 모임 송년회에 다녀왔다.

기말시험과 남편의 코로나 확진, 아들의 연이은 독감 판정으로, 지쳐버린 나는 '시'로 시작되는 어떠한 활동도 일부러 회피하고 있었다. 피곤했다. 무언가를 붙잡든 몸을 이끌 상태가 아니었다.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참 빨리 흘렀고, 올 한 해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부분을 보아도 전체를 보아도 시간은 참 빨리 흘렀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쉼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쉬운 감정을 내 몫으로 내버려 둔 채로.


찾아보니 올해 3월 30일이었다. 합평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 창작 시 2편을 써서 신규 회원으로 참석했다. '시'의 '시'자도 모르던 때였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그때는 시 쓰는 일이 참 쉬웠다. 떠오르는 생각을 그저 옮겨 적기만 하면 시가 되던 때. 그때 당시의 시 한 편을 위에 적어 보았다. 스스로 알에서 막 깨어 나온 병아리라고 생각하던 시절답게, 8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 다시 보니 뭔가 귀여운 느낌이 든다. 시에서 병아리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시 소재도 마침 계란에 관련된 것이었고.


오래된 추억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가, 내게 이런 시절이 있었나 싶어 낯간지러워지는 기분. 시를 보고 있자니 그런 기분에 빠져들었다. 나의 한 순간을 찰칵하고 찍어 놓은 것 같은. 아무래도 그 순간 나는 포즈를 취했다가 민망해서 포즈를 풀며 다시 어떤 포즈를 취할까 하는 그런 엉성한 상태에서 사진이 찍혔을 것이고, 그래서 표정도 활짝 웃는 것도 아니고 안 웃는 것도 아닌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다시 시집을 펼쳐서 시를 읽고 시를 다시 써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시 속에 엉성한 포즈로 남아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을 위해서라도. 재미있는 추억이 될 것 같다.


'처음'이라는 단어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미숙한 것이 당연하게 인정될 수 있는 건 '처음'이 가진 매력이다. '처음' 앞에서 잔뜩 겁을 먹고 긴장하던 어렸던 나는 점점 '처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또, 다음 해의 '처음'이 다가오고 있다. 온갖 다짐들로 시작될 한 해. 그저, 나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건강, 그리고 편하고 재미있게 시를 썼으면 하는 바람. 미숙했던 한 해를 보내고 나면 조금은 성숙한 한 해가 찾아오리라는 희망. 어제 보다 조금 성장한 나를 만나게 되기를. 나의 최대 라이벌은 어제의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아쉬운 감정도 흘러가는 시간에 씻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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