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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Apr 23. 2023

20. 자비심(慈悲心)

무아(無我)로 나아가는 과정

자비란 무엇인가? 간단하게는 중생에게 행복을 베풀며 고뇌를 제거해주는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중생(衆生)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 곧 중생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자(慈)는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소극적으로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 더 간단하게 말해서는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는 개념이 있다. 부처가 되어 다시는 생명의 윤회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마지막 깨달음을 미뤄 둔 자를 보살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관세음보살이 있고, 이분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화신이라고 본다. 흔히 말하는 자비의 화신이다.      

절에서 기도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절집에서 많이 하는 기도가 관세음보살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관음정근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나무(南無) 보문시현(普門示現) 원력홍심(願力弘深) 대자대비(大慈大悲) 구고구난(救苦救難)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죽 염불을 하면서 기도한다. 대자대비하고 고통과 괴로움에서 구제해 주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이 세상이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관세음보살의 전생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면, 아버지가 멀리 타국으로 돈을 벌러 나간 사이에, 계모로부터 학대를 받던 형제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버려진다. 형제는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죽기 직전에 큰 발원을 세운다. 형제는 다음 생에는 자기와 같이 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구제해 주겠다고 발원하면서 죽는다. 다음 생에서 형은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은 대세지보살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자신이 궁벽하고 처절한 상태에서도 자신과 같은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자비심이다. 그래서 관음정근을 시작할 때 대자대비 다음에 구고구난이 나오는 이유이다. 단단한 마음을 얻는 방법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냈을 때이고, 넓은 마음은 그 마음을 관조할 때 만들어진다. 불교적으로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에 의지해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단단하지만 넓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비심은 어설픈 동정심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동정심은 자신보다 처지가 괴로운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우월한 입장에서 열악한 사람에게 일으키는 마음이 동정이다. 자비심의 시작은 동정심이지만, 이보다 더 깊고 넓은 마음이다. 동정심이 인간의 마음이라면 자비심은 보살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다르게 해석하는 예도 있다. 마두관음이라는 존재인데 이분은 관세음보살의 또 다른 화현으로 유일하게 분노를 표현한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게 왜 분노의 표현을 하는 존재가 필요했을까? 이러한 점에서 요즘 말하는 자비와 구별된다. 지금 시대의 명상을 하는 분야에서 자비란 말의 의미는 서구사회에서 말하는 기독교적인 ‘사랑’이란 말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면 ‘자애, 연민, 친절 등의 의미가 같이 쓰인다. 아마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비는 비슷하긴 해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비심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하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익혀야 한다. 사무량심은 수행 방법이면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한량없는 중생에 대하여 일으키는 마음이면서 수행자가 한량없이 일으켜야 하는 마음이다.     


사무량심은 다음과 같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비무량심(悲無量心)은 남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무량심(喜無量心)은 남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하려는 마음,

사무량심(捨無量心)은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      


자세히 설명하자면 자비희사 중에 자비(慈悲)는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도움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닦는 것이고, 뒤의 희사(喜捨)는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난 뒤에 일어나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닦아나가는 마음이다.     


자무량심을 통해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은 수행으로 얼어버린 마음을 녹일 수 있다. 수행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 냉혹하게 면도칼로 저미듯이 내면의 번뇌를 없애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인간의 마음을 잊어버린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감정이 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인연이 생기면 다시 불처럼 일어난다. 자무량심은 그렇게 다시 일어나는 감정을 개인적인 욕망의 이기심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이타심이라는 원력에 실어내는 것이다.      


비무량심은 남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이다. 고통 자체를 없애주는 것도 있지만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도 있다. 고통 자체를 없애는 것은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다. 굶주리거나 갈증을 느낄 때 밥을 주거나 물을 주는 것 같은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직관적이기 때문에 실행하기가 쉽다. 하지만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방법이 거칠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에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마약이나 술을 끊게 하는 것이다. 마약은 말할 거도 없고 술도 과용하면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당연히 마약이나 술은 순간의 괴로움을 없애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괴로움을 없애지는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약은 당연히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술에 대해서는 관대하여서 술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오해와 어려움을 뚫고 행하는 마음이 비무량심이다.     


희무량심은 남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같이 기뻐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을 탑재하고 있다. 이 욕망은 육체라는 껍데기 속에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욕망을 이루기 위한 대상은 한정적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한정적인 대상을 통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이익이 되어야 하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생기면 뺏어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슬픈 숙명이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더라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기적인 질투와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일어나는 시기와 질투를 없애고 같이 기뻐하는 마음이 만들어지도록 수행하는 것이 희무량심이다.      


사무량심은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말하면 다른 세 가지 마음을 사용하고 나서 버리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용한 흔적조차 없는 마음이다.

중생들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즐거움을 주며, 같이 기뻐하더라도, 중생은 중생이다. 사람에 따라 은혜를 고마워하고, 갚으려고 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만 고마워할 뿐, 은혜를 갚기는커녕 고마워하지도 않고, 자신이 해결했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도움을 준 존재에 대해 배반하고 모함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마음이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이렇게 중생에 대해서 마음을 쓰기만 할 뿐, 그들이 그 이후에 어떤 마음을 내든 상관하지 않는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에게 기대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사랑이나 동정이 감정의 영역이라면 자비는 감정을 넘어선 영역이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자비를 쓸 자격이 생긴다. 그것은 감정에 대응하는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다. 감정도 품고 이성도 품는 마음의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끝없이 수행하고 수행을 통해 마음을 공부해서 나아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마음의 영역이 무한대로 커져서 나를 규정하는 것이 없어질 때, 즉 무아(無我)일 때 가능한 것이 자비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捨)무량심은 네 가지 무량심 중에 핵심이다. 마음을 쓰고 나서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자비희사라고 하는 수행방법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경지이다. 다시 말하면, 자비를 베푸는 과정이 무아(無我)로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무아를 이루어야만 진정한 자비의 마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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