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ked Sep 04. 2023

25. 명상과 유사과학

- 거짓으로 증명하는 방법

앞에서 명상을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알아봤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명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검증된 연구기관에서 명상에 관한 연구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고 재검증을 통해 실험의 오류를 최소화한 상태에서는, 명상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쌓이게 되고, 데이터의 축적은 명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유사과학이다.


유사과학(類似科學, Pseudo-science), 의사과학(擬似科學) 또는 사이비 과학(似而非科學)이라고 하며,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연구나 증명과 일절 관계가 없거나, 관계없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면서도 과학적인 것처럼 주장되거나 수용되는 대상, 또는 이러한 대상의 수용을 유도하는 이론이나 주장을 말한다.

이는 과학의 복잡성과 대중적 이해도 사이의 괴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상품이나 신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주입하려는 목적의 지적 사기에 해당한다. 대중적으로는 과학적 연구의 산물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본래부터 과학이 아닌 것'인 비과학과는 구별되며, 그 밖에 병적과학 혹은, 쓰레기 과학이라는 용어도 사용된다. 병적과학은 어빙 랭뮤어가 제안한 용어로, 과학자가 자기도 모르게 편향이나 주관적 실수가 발생하였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활동을 말한다. 쓰레기 과학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구 결과를 왜곡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 출처: <나무위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유사과학의 대표적인 예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의 양파실험’, ‘게르마늄 육각수’, ‘음이온 라돈침대’ 등이다.


이런 유사과학의 특징을 다시 말하면, 위에서 정의한 것처럼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수많은 실험 결과에 대한 자료나 그런 실험결과가 학술지에 게재된 것처럼 꾸민다. 또한 외국의 유명한 교수가 인정했다는 식의 인터뷰 내용과 사진이 첨부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검증된 경우가 거의 없고, 학술지 역시 출처를 알 수 없고, 유명하다는 교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종의 사기인 것이다. 또한 유사과학은 결과를 정해놓고, 여기에 맞는 과학적인 근거들을 끼워서 맞추는 방식으로 효과를 과장한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명상을 하더라도 이런 유사과학에 빠지는 경우가 꽤 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명상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과학이라는 이름에 속아서 유사과학에 빠지기도 하고,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신비함을 과학으로 증명하고 싶어서 이런 유사과학을 신봉한다.     


명상법은 어떤 명상법이든간에 주관적 체험을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 명상이란 것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완화해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자신이 느끼는 괴로움의 정도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상을 하게되면 그동안 삶을 살면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주관적이지만은 않은 경험이란 걸 알기 위해서 혹은, 이런 경험들 속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기 위해서 객관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명상을 포함한 세상의 그 어떤 분야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후에는 반드시 그 분야에 대한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진다. 명상의 경우, 괴로움도 좀 약해진 것 같고 삶에 자신감도 생기게 되고 나면, 자신에게 뿌듯한 마음이 생겨서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수준을 과신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새로운 자아’와 연결되는데, 명상을 하면서 초발심에 생기기 쉬운 작은 체험과 경험을 꽤나 큰 체험과 경험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정욕구를 넘어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수준을 찾아 헤매다 보면 정통적인 책, 특히 고전들은 어렵게 느껴지고 무슨 말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사실 명상에 대한 이론이 실려있는 고전-대부분 불교경전임-은 현대어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수많은 세월 동안 검증된 이론이라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다 보면, 쉬운 이론에 현혹되기 쉽고 자신에 맞는 내용에 심취하기 쉽다. 이럴 때 제일 쉬운 방법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유사과학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것이다. 유사과학은 과학과 신비주의의 중간쯤에 걸쳐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적인 것같이 보이는 논리와 이론, 그리고 자신의 체험에 대한 환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유사과학은 적당한 위치에 놓여있다.      


2000년대 초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열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추종했고 열광했다. 하지만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근거 없는 유사과학임이 드러났다. 문제는 이 기간에 열광했던 사람들도 역시 방향을 잃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검증이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이 책을 쓴 저자의 말처럼 물이라는 물질도 사람의 마음을 실으면 변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기도나 명상의 효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실험관찰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특정 종교단체에서는 가능하고 일반 집단에서는 불가능하다면, 결과의 보편성과 합리성이 없는 것이다. 종교는 특수성과 비합리성이 혼재하지만, 명상은 보편성과 합리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명상을 통해 특수성과 비합리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종교화되어가는 명상일 수 있고, 우리는 이런 방향성은 지양해야 한다.     


유사과학에 빠지는 것은 명상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긴다. 명상의 목적을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자신의 수준을 비교해서 검증하는 것이 필요할까 싶다.   명상은 계속해서 하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혹은 자신이 얼마나 괴로움에서 벗어났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명상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문득 마음이 전보다 고요해졌음을 느끼게 되고, 문득 마음이 성장했음을 알게 된다. 명상은 객관적이고 기계적인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이고 모호한 상태가 지속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명상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자신의 수준을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명상은 다른 사람과 수준을 겨루거나 자격증을 따는 것이 아니다.      

구정(九鼎)선사가 솥을 아홉 번 고쳐 걸고 깨달았다는 일화는 훌륭한 스승과 좋은 제자 사이에 어떻게 마음공부가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스승이 제자의 근기를 보며 기다리면서 제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도록 인도해주는 스승이 거의 없는 시기이다. 이렇게 올바른 스승이 없는 시기엔 숭산스님의 말씀인 ‘오직 모를 뿐’이라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일과처럼 명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뿐, 자신의 존재는 잊어야 한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살다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문득 변화되고 발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런 것이 명상을 잘 실천해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24. 명상과 과학(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