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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Apr 12. 2020

[도서] 모월모일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


올해 들어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도, 좀처럼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게 더 좋았다. 시간은 많아졌는데, 머릿속은 더 복잡해져서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음을 가다듬고,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글자를 읽어나가야 하는, 무척이나 품이 드는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SNS를 보다가 팔로우한 출판사 게시글에서 '모월모일’을 접했다. 짧은 몇 구절이었지만, 문장이 예뻤다. 요즘 가사가 예쁜 음악을 들으면, 나도 저런 가사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가사 스크랩을 하던 터라, 뭔가에 홀린 듯 책을 바로 구매했다. 읽어보고 좋으면 주변 사람들한테 추천해줘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루 만에 받아본(요즘은 책 배송이 칼배송이다!) '모월모일'은 표지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분홍분홍. 말랑말랑. 봄바람에 말랑말랑해진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처음 읽어보는 산문집이었는데 지식을 얻고자 머리를 싸매가며 읽을 필요도 없고, 읽다가 흥이 끊길까 봐 불안해할 필요도 없이, 마음이 갈 때마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며칠이 걸렸다.


책을 다 읽고, 처음에 보았던 책 표지를 다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씨앗이다. 씨앗 자체만으로는 그저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목마름을 해결해 줄 물을 만나고, 따뜻하게 몸을 녹여줄 햇빛을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것만으로도 씨앗은 새싹을 틔우겠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지나치는 작은 감정, 사건들을 잘 보듬으면 씨앗을 더 빠르게 성장시켜 줄 거름이 된다. 그렇게 씨앗은 햇빛과 물과 거름을 만나 뿌리를 내린다. 더디지만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러니 내가 아직 미성숙한 이유는 나를 더 튼튼하게 성장시켜 줄 거름을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 앞에 명확하게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게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잘 보고, 보듬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힘 없이 스러져가려고 할 때마다 나를 일으켜주는 거름이 될 수 있도록.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들을 정리해보았다. (내가 다시 보려고 후후)




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작은 공간, '나만이 머무는 작은 방'으로서 옷은 얼마나 특별한가? 옷 안에서 내 몸과 정신은 날마다 하루를 '같이' 사는 것이다.  -34P


그들은 느슨함과 무심함을 포크와 나이프처럼 쓴다. -39P


초심을 지키는 일은 가장 어렵다. 나무에 오르는 사람이 작은 나무에 오르고 나면 큰 나무가 보인다. 기를 써서 큰 나무에 오르면 웬일인지 큰 나무도 시시해 보인다.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높이가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은 못한다. 성장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깊어지는 일이라는 것,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일이란 것을 모른 채 숲을 헤맨다. 성장의 비밀은 뿌리에 있다. 팔을 위로 올리고 싶으면 아래에서 반대로 당기려는 몸통과 다리가 있어야 한다. -55P


'화살'을 '말'로 치환해 읽어본다. 내게서 떠나 과녁에 박힌 말. 죽지도, 도착하지도 않고 상대의 가슴팍에서 여전히 "꼬리를 흔들고" 있는 말. 박히고 있는 중인 말. "온몸을 흔들고" 있는 말, 무서워라! 생각해보니, 그의 무른 마음에서 내 말이, 미친 말처럼 달리고 있을 것 같아 미안한 맘도 든다. -91P


전동차를 타고 자리에 앉아 책을 다시 읽는 동안에도 그 책을 그냥 가지고 나와버렸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처음으로 책 도둑이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책은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온 거란 생각이 들었다. - 124P


잘못한 사람은 용서를 준비하고 상처 받은 사람은 용서를 구하는, 불편한 시차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138P


좋아 '보인다'는 것에 주목하자. 보이는 것은 실제와 다르다. 오해는 나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것, 생각이 가는 대로 가보자고 떠나는 이기적인 산책이다. 실체를 보지 못하고, 테두리만 볼 때 일어나는 '작은 비극'이다. -146P


by. 모월모일 / 박연준 산문집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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