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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Jun 26. 2019

스포일러가 완성하는 이야기들

   homo narrans. 인간은 서사적 존재입니다. 누군가는 우리를 storytelling animal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는 우리에게 저항치 못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시이모가 제게 들려주던 용사의 이야기가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더없이 선명하고 간단한 선악의 대비와 갈등의 구조를 가진 것이었음에도 나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미소 지으며 이야기의 결말을 다음 날로 미루는 것은 내겐 꽤나 버티기 힘든 고문이었습니다. 물론, 용사는 언제나 승리했고 나 역시 언제나 그의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나이가 차고 키가 커갈수록 변함없이 승리하는 용사의 이야기가 옛날처럼 흥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용사가 파멸하는 비극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서사의 폭과 깊이에도 어느 정도 반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따금씩 용사의 이야기는 그 마력을 되찾으며 전설처럼 부활할 때도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어벤져스> 시리즈가 그렇습니다. 결국엔 악당이 질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소년소녀로 돌아가 다시금 되묻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이와 같은 서사적 갈증을 매우 비틀린 방식으로 소멸케 하는 게 있으니 바로 스포일러입니다. "누가 희생하고 누가 배신해서 누가 죽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야기가 갖는 신비한 마력은 천사가 날개를 잃은 것마냥 땅으로 추락합니다. <어벤져스>의 제작진이 각기 다른 결말을 가진 여러 대본을 만들기까지 하면서 그 유출 경로를 색출해내고자 했던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스포일러가 이야기에 대해 가진 힘은 파괴적이니까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스포일러로 완성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미리 본 해답지가 이야기 향유 과정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테바이의 지혜롭고 빛나던 왕이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스포된' 이야기가 갖는 극적 아이러니를 통해 서사에 깊이와 힘을 더합니다. 대체로 그리스 극(劇)의 관람자들은 작품의 전반적인 배경과 내용을 당시 전승되던 신화들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창작자에 따라 서사의 세부와 방점이 달라지곤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 극들은 이처럼 서로가 이미 암묵적으로 약속한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 향유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작품 체험의 과정에 소포클레스는 하나의 층위를 더 껴넣습니다. 그는 등장인물과 관객들이 갖는 지식의 격차를 의도적으로 이용하여 작품의 비극성을 고조시킵니다. 관객들은 오이디푸스 왕의 전설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작품 속 왕은 자신의 출생에 대하여,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죽였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현재 자기 아내의 전남편이며, 테바이의 선대 왕인 걸 모르면서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해 사건을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양" 조사하겠다고 단언합니다. 또, 사건의 전모를 알기 위해 부른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되려 오이디푸스가 힐난하자 예언자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한데 그대가 내 눈먼 것을 비난하였으니, 선언하겠소.

그대는 앞을 보면서도, 자신이 어떤 악 속에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소.  ......

      그리고 언젠가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가 무서운 발로 쫓으며 양쪽에서 그대를 치고 이 땅에서 쫓아낼 것이오, 지금은 제대로 보지만 그때는 어둠만을 보게 될 그대를."


   아직 이 무서운 예언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오이디푸스와 달리 감상자는 아득한 곳에서부터 점점 더 그 모습을 그려내며 다가오는 파국에 숨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운명처럼 예정된 결말을 향해 이 불행한 왕과 묵묵히 동행하게 됩니다.



   나머지 하나는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하나의 잘 짜인 서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진실되게 술회하고 고백하는 자신의 삶만큼이나 고유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고흐가 남긴 편지들 역시 우리가 들여다보고 그와 동화하는 체험을 가능케 하는 이야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남긴 편지들 역시 - 오이디푸스의 때처럼 - 그의 삶이 어떠한 굴곡을 거쳐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알고 읽을 때 완전히 다른 무게와 의미로 다가옵니다.


   엄격했던 목사 아버지를 두었던 고흐는 마찬가지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결국 종교에서 구원을 찾지 못하고 뒤늦게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에 총탄을 쏘기 전까지 그는 고독과 가난으로부터 끝끝내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몇몇 스케치를 제외하고는, 그가 생전에 팔았던 유화 작품은 단 한 점뿐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방아쇠를 누르던 날까지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간신히, 그러나 힘 있게 분투했습니다.


   1882년 초, 그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 고흐는 테오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씁니다.


      "날 믿어라. 하루 종일 지칠 정도로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아주 기쁘게 말이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없다면, 아니 더 열심히 할 수 없다면 용기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  단지 돈이 부족할 것 같아 걱정이다.  ...... 그러니 빨리 답장을 보내다오.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다오. 테오야, 내 안에 어떤 힘이 있는 걸 느낀다. 난 그걸 밖으로 꺼내 풀어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림에 대한 고민과 근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구나. 거기다 다른 근심들까지 겹치고 모델비도 줄 수 없게 된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네게 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도록 만드는 게 너무 미안하지만, 지난 겨울처럼 나쁜 상황은 아니다. 난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 한다. 붓에 더 힘을 갖게 되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그릴 거다. 우리가 열정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네가 더 이상 돈을 보내줄 필요가 없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고흐의 이 편지를 읽고 나는 책의 다음장으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느꼈던 자신 안의 힘은 의심할 여지없이 커다란 것이었습니다만 그가 내다보았던 앞날과 우리가 돌이켜 본 그의 날들이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며칠 전에 썼던, 동생에게 결국 부치지 못한 그의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정한 편지, 그리고 50프랑 고맙게 잘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들의 앞날이 이야기를 '완성'시켰다고 말하면 책장 속 오이디푸스가, 무덤 속 고흐가 어쩌면 성을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한 것일 테니요. 하지만 운명의 굴레에 갇혔던 왕의 이야기가, 강렬한 색채만큼이나 아름답게 타오르던 불꽃의 영혼을 가진 화가의 편지들이 우리에게 멸하지 않는 것들로 남은 데에는 분명 그 '스포일러'의 역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정된 비극에 맞섰던 고귀한 영혼들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차마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미지 출처 : Vincent van Gogh, <Beach at Scheveningen in Stormy Weather> & Alexandre Cabanel, <Oedipus Separating from Jocasta> &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

[ 참고문헌 : 소포클레스, 강대진 역, <오이디푸스 왕>, 민음사(2009). & 빈센트 반 고흐, 신성림 역,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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