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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Jan 29. 2024

당신을 응원해

  아내가 가방을 메고 한 손엔 여행 가방을 끌고 또 한 손엔 여권과 티켓을 들고 출국장으로 들어간다.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확인하곤 안심한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사라졌다. 


  아내는 미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놀러 오라고 한다면서 “한번 가볼까?”라고 묻기에, “그럼 추진해 봐.”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실제 미국에 가게 된 것이다. 어학연수를 받기 위한 개강일이 며칠 남아 있지 않아서 기한 내에 수속을 마치고 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물론 다음 학기에 가도 되지만 미루면 다시 시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내는 평소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직장생활과 육아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음에도 미련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시간을 내서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언어라는 것이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과 생활을 병행하면서 하다 보니 실력이 잘 늘지 않아 늘 답답해하던 차였다. 그런 아내를 위해 온전히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한 아내에게 잠시나마 휴식의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더 늦으면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초조감마저 들었다.


  일단 비자를 신청하고 인터뷰를 받기 위해 미국대사관에 갔다. 특별한 이유만 없으면 비자가 나오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긴장되고 떨린다고 했다. 인터뷰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챙기는 아내의 모습에서 소풍을 가는 아이의 설렘과 기쁨을 보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요즘 같이 아내가 긴장하면서도 기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좋은가 보다. 좀 더 일찍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이들도 엄마가 멀리 간다는 사실에 조금은 불안해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아내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밝다. 미국대사관 직원이 불친절하였다며 약간 불만 섞인 투정을 하였지만, 결론은 인터뷰를 잘 마치고 비자가 며칠 내에 나올 거라는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저녁에 아내와 같이 식사를 했다. 식사 내내 미국대사관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랜 인터뷰 끝에 불허되어 결국 경비원에 끌려 나간 사람의 이야기, 아이와 같이 온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 경희대 학생은 쉽게 통과하였다며 학교는 좋은 곳을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 자신도 공직에 있었으면 쉬웠을 텐데 퇴직을 하고 사업을 한다고 나니 꼬치꼬치 물어봐서 아차 하면 불허가될 뻔했다는 이야기.... 뭐가 그리 신나고 좋은지 인터뷰 이야기가 끝이 없다. 


  연수는 친구가 사는 켄터키주에 있는 캠벨스빌대학에 개설된 외국인 어학 과정을 다니겠다고 했다. 공립이기도 하고 친구 집에서 거리도 가까워서 적은 비용으로 한 학기를 다니기에 적당할 것 같다고 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입학에 필요한 서류와 일정도 알아보고, 학교 직원과 통화도 하면서 직접 허가신청서를 작성했다. 기간이 촉박하여 고생을 많이 했다. 대행을 해서 하라고 하였으나 이것도 공부라면서 한사코 직접 준비했다. 마감 전날 간신히 서류를 접수하고 며칠이 지나 메일로 허가서를 받았다. 자신이 직접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정말 기뻐했다.


  떠나기 전 일요일엔 어머니를 찾아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셨다. 조반을 늦게 드셔서 생각이 없다고 하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으셨나 보다. 어머니의 눈에는 자신만을 위해 남편과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못된 아내로 보였을 것이다. 아내도 어머니의 이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결국 어머니와는 식사를 같이하지 못하고 인사만 하고 돌아서 왔다. 어머니도 응원까지는 아니어도 편하게 다녀오라는 마음에서인지 별반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으셨다. 


  나는 내심 기대가 컸다. 일상의 생활과 처자식에 신경을 쓰느라고 소홀하고 미뤄졌던 어머니와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6개월이지만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결혼 전 아들의 모습으로 함께하고도 싶었다.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다. 저녁부턴 내가 직접 요리도 하고 음식 정리도 하면서 살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재미도 있고 의욕도 있으면서도 이런 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내도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집안일은 나에게 전적으로 맡겨두기 시작했다. 


  드디어 비자가 배달되었다. 아내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과 같이 장을 봐서 가족 만찬을 위한 준비를 했다. 아이들도 엄마의 연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고, 이것저것 걱정되는 것도 챙겨주고,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건강하게 있다가 오라고 응원하였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살면서 한순간도 쉬지 못하고 달려왔기에 잠시라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진정한 휴식을 하고 오기를 바랐다. 아내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큰애 군 복무, 아이들 대학 진학, 사업체 운영, 집안일과 같은 많은 걱정을 하며 이렇게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수도 없이 망설이며 연수 길에 올랐다. 


  공항을 빠져나오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당신을 열렬히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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