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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May 05. 2024

반성문

  아내에게 잘못했다. 아직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퇴직을 했다. 나는 퇴직한 아내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 그런 아내에게 이제라도 반성문을 쓴다. 아내는 엄청 힘든 퇴직 결정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애써 외면하며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도 퇴직을 했다. 퇴직 후에 밀려오는 공허함과 자괴감, 우울증, 무력감 등으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아내는 따뜻한 말로 공감해 주며 퇴직한 내가 잘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미안한 마음에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며 지내고 있다.


  10년 전, 50이 될 무렵 퇴직을 고민하였다. 그냥 한번 해 보는 생각이 아닌 신중하게 고민하며 퇴직 후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민의 발단은 이랬다. 60 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여도 10년 넘는 세월 동안 경제생활을 하며 지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정년은 두렵고 불안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퇴직을 하고 새로운 인생 2막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면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퇴직을 하여도 법무사라는 자격증이 주어지므로 내심 든든하기는 했다. 선배들 대부분이 퇴직 후에 법무사를 개업하여 지내고 있으니 나 또한 그리 가는 것이 극히 당연하고 안전한 선택이라는 사실도 잘 안다. 나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평생 법을 가지고 살았으니 인생 후반부만큼은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특히 문과생의 경우 말로 평생을 살아와서 기술이나 특기가 전무하다. 기술이나 자격증도 없는 힘 빠지고 노쇠한 60넘은 된 퇴직자를 받아줄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조기 퇴직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굳히고 아내에게 퇴직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아내는 왜 퇴직을 하려고 하는지 물었다. 미리 준비한 답변을 최대한 조리 있게 말했다. 아내의 떨리는 눈빛이 철없는 아이를 보는 듯했다. 아내는 나의 결심이 매우 완강해서 쉽게 바꾸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간파한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며 내달리는 나의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하였다. 


  며칠이 지나고 아내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내는 자신이 퇴직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가정의 불안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퇴직이라면 누가 해도 괜찮지 않으냐고 했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까 위험이 조금이라도 적은 선택을 하자면서 나보다는 자신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자기가 먼저 나가서 사회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 퇴직을 하라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면서도 일단 설득력도 있고 아내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평생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가정 일만 하며 지내는 여성들도 많은데 아내라고 평생 자신의 시간도 없이 직장에 매어 살라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고생을 많이 했으니 이제라도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루 한두 시간 정도만 일을 하며 즐기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1년 정도 준비를 하고 아내는 퇴직을 했다. 평생 공직에만 있다가 사회에 나아가는 길이라 조금이나마 안정적이고 쉬운 일을 선택하려 했다. 고민 끝에 프랜차이즈 창업을 하게 되었다. 지역에서는 꽤 알려져 있고 환경에 따른 기복도 적다고 판단하여 콩나물국밥 프랜차이즈인 “현대옥”을 인수하여 시작했다. 그때부터 폐업을 한 3년 6개월 동안 아내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휴일도 없고, 하루 24시간 온통 신경을 써야 하고, 직원 관리도 너무 힘들고, 수입이 적어지면서 아내가 직접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내는 식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무척 힘들어했다. 아내의 건강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마음으로는 아파하면서도 전혀 도와주거나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오히려 잘하지 못함을 질타하거나 외면하기까지 했다. 평생을 공직에서만 생활하다가 홀로 사회의 매정한 현실과 부딪히며 얼마나 괴롭고 아파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도 죄인의 심정이다. 아내가 대신 걸었던 길을 내가 걸었다면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하고 무슨 사달이라도 났을 것이다. 


  아내는 이런 일을 미리 예상하고 자신이 하겠다고 나선 것이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험한 길이기에 유약한 남편보다는 자신이 먼저 첫발을 내딛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매사 성실하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아내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지치고 표정이 어두워지지 시작했다. 가게를 접자는 권유에도 손해 본 것이 많다며 끝까지 해보겠다고 했다. 결국 결단을 내려 가게를 양도하고 사업을 접었다. 처음에는 매우 아쉬워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내는 옛날의 환하고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그간의 굴레가 얼마나 무겁고 힘겨웠는지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원망이나 불평도 없이 그 세월을 견디어 온 것이다. 


  퇴직을 하고 많이 힘들었다. 정년퇴직을 했음에도 회사에 대한 미련이 남고,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부딪혀 여기저기 상처도 입으며 적응하는데 어려웠다. 말수도 적어지고, 매사 자신감이 떨어져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했다. 새로 맡은 일이 험한 일이다 보니 욕도 먹고 폭행의 위협도 당하였다. 아내가 나섰다. 함께 동행해 주고, 힘든 일이 생기면 대신 처리해 주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앞서 대응해 주었다. 사회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용기도 주고 잘하고 있다는 따뜻한 말로 응원해 주었다.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그때 아내에게 이런 행동과 말을 해주지 못했을까? 못난 남편을 탓하고 불평불만이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반성문이 너무 늦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매일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표현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세월이 흘러도 아내의 아픔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겠지만 새 살이 돋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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