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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히 Jan 22. 2021

아빠에게는 내가 모르는 시간이 있다

젊은 날의 상욱씨, 나랑 친구해 줘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유난히 끝이 네모난 아빠의 손가락을 보았다. 한창 살이 찌고 있는 아빠를 어제처럼 놀렸다. "아빠 이제 손가락도 살찌나 봐, 손가락이 네모야. 뚱뚱이다" 아빠는 "살 진짜 빼야 되는데" 라며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손가락은 다쳐서 네모난 거라는 말을 했다. 아빠가 손가락을 다친 적이 있나? 23년을 같이 살며 그런 기억은 없다. 내가 아빠의 젊은 날을 물어볼 때도 손가락을 다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

내가 물었다. 언제 어디서 다쳤냐고. 괜히 내가 아빠의 아픈 구석을 만진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빠는 젊을 때 알바로 갔던 곳에서 기계에 문제가 생겨 손가락 끝이 아주 조금 잘렸다고 했다. 다행히 아주 조금이었고 그 위로 다시 손톱도 나서 아무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손가락을 통째로 자르네 마네 얘기가 나와 괜히 무서웠었다고. 여름이라 깁스가 힘들었고 그로 인해 덧나지 않게 마이싱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너무 많이 맞아서 마이싱 중독이 왔고 그 이후로 피부가 망가졌다는 얘기도 내가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이싱을 멈출 수 없어 마이싱 중독이 되지 않는 약도 함께 처방받았고 그때부터 아빠의 피부가 조금씩 상했다고. 지금 아빠가 밤마다 어느 한 곳씩 돌아가며 가려운 건, 예전부터 지금,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려움을 막아주는 약을 먹어야 하는 건 마이싱 중독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어릴 적부터 아토피로 고생한 이유가 아마 아빠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 걸 거라고. 아빠는 미안해했다. 미안하다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말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빠도, 나도 가렵고 따갑고 예민한 피부로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야 그 원인을 알았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아빠 왜 다쳤던 거 말 안 했어?"

"잊고 살았으니까. 지금 네가 물어봐서 기억났어"

다행이었다. 아빠는 그래도 괜찮았구나 싶었고, 내 나이쯤이었을 아빠의 젊은 날이 걱정되었다. 스물세 살의 아빠는 그때 많이 무서웠겠지. 젊은 아빠는 누구에게 위로받았을까. 내가 그때도 아빠 딸이었다면, 아니 친구였다면 세상에서 최고로 든든한 위로를 보여줬을 텐데. 아쉽고 미안했다. 아빠가 다쳤을 때 내가 옆에 없어서, 지금은 그 아픔과 무서움을 잊고 사는 아빠가 짠했다. 시간이 약이 되어주어 고마웠고 아무렇지 않게 다 나아준 손가락이 고마웠다.


내가 모르는 아빠의 시간이 참 길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빠한테 들었던 몇몇 이야기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38년. 아빠는 그 긴 시간을 나 없이 보냈다. 아직 그 절반 가까운 시간밖에 살 지 못한 내 인생도 이렇게 복잡한데, 38년은 얼마나 길고 복잡할까. 아빠의 지난 인생을 나는 반의 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우리 아빠"라는 이유로 아는 척했다. 아빠의 긴 시간들에 내가 없고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심한 것이 하나 있다. 앞으로 더 아빠의 과거를 궁금해해야겠다는 것. 이제 주말마다 아빠의 과거를 물어볼 것이다.

"아빠의 스무살은 어땠어?"

나의 질문이 아빠에게 잠시나마 행복한 여행을 선물하기를 바라며. 아빠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9.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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