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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영 Feb 11. 2023

한라산은 그 자리에 있다

산이 나를 부른다

나는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걸 어제 알았다. 집에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검색해 보다가 알게 된 것이다. 난 이 놀라운 사실을 팀장님에게 곧장 알렸다. 팀장님,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래요, 아셨어요? 팀장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것도 모르고 올라갔다 온 거예요? 하고 물었다. 팀장님, 밥 먹을 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다 알고 드세요? 아니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한라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나는 그 산에 올라가기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수영을 하고 있으니까 기초체력은 될 것이라고 믿었고, 러닝을 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다 전현무 때문이다. 전현무도 하는데 내가 못 할까. 전현무도 올라갔다 왔는데 나는 완전 가능하지. 전현무도 하는데, 전현무도 했는데! 전현무보다는 나은 몸뚱이라는 확신이 나를 한라산으로 이끌었다.


한라산은 그냥 오를 수 없다. 한라산 탐방 예약 시스템에서 내가 언제, 몇 시에 오를 것인지, 어떤 코스로 오를 것인지 미리 결정해서 예약해야 한다. 한라산 등반 코스는 관음사와 성판악이 있다. 관음사는 가파르고 힘들지만 경치가 멋있고 성판악은 완만하지만 지루하다. 하지만 이건 그냥 구전 설화처럼 전해지는 얘기일 뿐이다. 관음사는 가파르고 힘든 게 맞다. 경치가 멋있냐고? 올라가 보면 알겠지만 프로 등산러 날다람쥐가 아닌 이상 경치고 뭐고 볼 겨를도 없다. 그냥 땅과 내 앞에 있는 사람의 궁둥이만 보고 오르는 거다. 경치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나 즐기는 거지 인생 첫 등산을 한라산으로 선택한 나한테는 가당치도 않다.


나는 겁도 없이 관음사 코스를 선택했다. 무지함이 만들어낸 패기다. 전날까지만 해도 경치를 즐길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와 나는 관음사 탐방로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이번 제주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한라산 등반이었기 때문에 친구와 나의 캐리어에는 온갖 등산용품만 가득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고 패션쇼 하듯 등산복을 입어 보며 저녁 내내 깔깔댔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지만 둘 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내가 잠들지 못한 건 아침에 먹어야 할 ADHD 약을 저녁 약으로 착각해 12시에 꿀떡 삼켜버린 탓이었다. 망했다고 느낀 순간부터 뇌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에 절어 있는데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다. 친구도 잠을 설치는 것 같았다. 한라산에 오르려면 자야 해, 자야 해, 지금 잠들어야 한다고! 아마 우리 둘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양을 세기 시작했고 친구는 유튜브로 명상, 전생 체험 같은 걸 검색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벽 내내 뒤척이다 다섯 시에 번쩍 눈을 떴다. 그래, 마음을 비우자. 한라산은 도망가지 않아. 늘 그 자리에 있다고. 또 오면 돼! 우리는 퀭한 얼굴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와 호텔 로비에 우리처럼 퀭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등산 가방을 짊어지고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인간들은 참 부지런하구나!


관음사 탐방로에 도착하자 등산복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좀비처럼 기어 나왔다. 누구는 상쾌한 얼굴이었고 어떤 누구는 벌써 지친 얼굴이었다. 입구 앞에서 사람들이 아이젠을 장착했다. 우리도 얼른 따라서 아이젠을 끼우고 스틱을 쥐었다. 그리고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헤드 랜턴을 머리에 끼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친구와 나는 약간의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가뿐하게 출입문을 통과했다. 닥칠 일을 알았다면 뒷걸음질 쳤을 것이다.


추위에 대비해 등산 양말 두 개, 장갑 두 겹, 핫팩 여섯 개를 챙겼는데 예상외로 날씨는 너무 따뜻했다. 스틱을 맨손으로 쥐고 올라가도 될 정도였으니 운이 참 좋았다. 하지만 전에 내린 눈이 허리춤까지 쌓여 있어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내 발밑에 있었고 탐방로를 표시해 둔 줄은 눈에 파묻혀서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앞사람들이 길을 터놨다고 해도 허리까지 쌓여 있던 눈을 헤치고 올라야 하니 다리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우리는 배려심 많은 등산객인 척 뒷사람들에게 길을 터주고 그 틈을 타 숨을 돌리며 오르고 쉬는 걸 반복했다.


한라산을 오르다 보면 중간중간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다. 그 안내판에는 코스별 난이도가 색깔로 분류되어 있는데 초록색은 쉬운 길, 노란색은 조금 어려운 길, 빨간색은 어려운 길이다. 그런데 그 안내판은 등산객들을 속이고 있다. 등산객들을 속여 정상으로 향하게 만들기 위한 속임수다. 그 안내판을 내 방식대로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다. 초록색은 힘들다. 노란색은 개 힘들어서 침이 나올 지경이다. 빨간색은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당장이라도 119를 눌러 헬기를 부르고 싶게 만드는 코스를 말한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보려면 코스별 대피소를 12시 안에 통과해야 한다. 1시 30분부터 정상 통제를 하기 때문에 12시에 대피소를 통과해야 시간 안에 오를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우리는 11시쯤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앞서간 사람들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거지꼴이 되어 대피소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눈 때문에 바닥이 죄다 질퍽거렸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건덕지도 아니다. 오르는 걸 유난히 힘들어했던 친구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말없이 컵라면을 먹었다. 이때쯤 현타가 찾아온다. 나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 왜 거지같이 땅바닥에 앉아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가. 컵라면은 또 왜 이렇게 맛있는가. 우리는 왜 다 이러고 있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빨리 집어치우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정상을 가는 길 보다 되돌아가는 길이 더 멀기 때문이다.


대피소를 벗어나자 벌써 정상을 찍고 하산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을 따라 도로 내려가고 싶지만 멍청한 생각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눈물을 삼키며 다시 오른다. 대피소를 지나면 사람들이 말한 관음사 코스의 그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말 멋있었겠지. 친구는 봤을까. 그 멋진 경치를. 나는 하나도 보지 못했다. 볼 수 없었다. 내가 본 건 오로지 흰 눈과 앞사람의 엉덩이다. 경치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그냥 119를 누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관음사 코스는 대피소를 지나고부터 죄다 빨간색 길이다. 앞서 말했지만 빨간색은 힘든 길 정도가 아니다. 이건 빨간색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표시하고 해골 표시를 붙여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다 돌길에다가 가파르긴 또 왜 그렇게 가파른지. 눈 때문에 계단은 계단 역할도 제대로 못 하고 줄도 죄다 파묻혀서 발을 잘못 디뎠다간 그대로 천국행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뒤처지는 그룹이 생긴다. 그 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서로 양보하기 바쁘다. 배려심이 많은 사람만 남은 것이라고 위로해 본다. 내가 앞서가다가 뒷사람이 오면 그 사람을 보내고 그 사람이 앞서가다가 내가 가면 그 사람이 양보한다. 그런 식으로 오르다 보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묘하게도 우정 같은 게 생겨나기 시작한다. 마음속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오르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 저기에 또 있구나. 아직 저기에 있구나.. 하며.


한라산은 참 이상한 산이다. 아니면 모든 산이 그런 걸까. 분명 꼭대기에 올라왔는데, 구름이 내 발밑에 있고 더 이상 오를 길이 없는데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정상에 가까워지면 하산하는 그룹이 오르는 그룹에게 파이팅을 외쳐준다. 자자, 다 와 갑니다! 힘내세요! 하면서. 나는 내려오는 아주머니를 붙들고, 저기.. 얼마나 남았어요?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 와 갑니닷! 20분만 더 가면 됩니다앗! 하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래 20분.. 나는 저 뒤에 정지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친구에게 20분 남았다! 하고 외친다. 친구에게선 답이 없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며 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이번엔 아저씨를 붙들고 묻는다. 아저씨.. 여기가 정상 아니에요? 더 오를 산이 없는데요.. 그 아저씨는 웃으며,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봉우리를 가리킨다. 20분만 더 가면 됩니다! 나는 좌절한다. 아니, 아저씨.. 아까도 20분이랬어요오오!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사라진다. 나는 그냥 드러눕는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건 말건 나자빠져 있는다. 얼마 뒤 친구가 내가 드러누워 있던 전망대를 천천히 지나친다. 나는 다시 기합을 넣고 친구 뒤를 따른다. 하산하는 사람들의 파이팅! 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우리는 영혼이 빠진 상태로 좀비처럼 오른다. 어디가.. 어디가.. 정상이에요.. 지나가던 아저씨가 200미터만 더 가라고 한다. 200 메다요오옷? 나는 까무러친다. 아저씨는, 200 미터면 금방이지, 금방이야! 다 왔어요! 하고 나를 격려한다. 한라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다 뻥쟁이들이다.


200미터는 아니었지만, 전망대에서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상이다. 백록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백록담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도착과 동시에 모두가 드러눕는다. 아예 침낭을 펴서 누워있는 사람도 있다. 정상에 있는 한라산 돌멩이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약 100명 정도 서 있다. 우리는 그냥 백록담을 배경으로 대충 사진 몇 장을 찍는다. 백록담이 얼마나 멋있는지, 백록담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친구와 나는 그냥 눈밭에 누워 잠깐의 휴식을 만끽한다. 대화할 힘도 없다. 친구는 배가 고프다고 했고, 나는 그냥 울고 싶었다.


내려가는 길은 아주 쉽다. 왜냐면 내 의지로 내려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다리가 움직여서 내려가는 거다.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면 내 마음대로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미친 듯이 내려가게 된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다. 친구는 마치 굴러가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하산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걸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졌다. 우리는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그냥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이걸 함께 등산했다고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따로 등산했다고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여튼, 미친 듯한 속도로 내려가는 우리를 보고 어떤 아저씨가 딸에게 말했다. 저분들 좀 봐, 저분들은 산행을 많이 하신 분들이야. 속도가 남다르잖니? 우리가 아무리 빨리 내려가도 금방 따라 잡힌다고. 저는 태어나서 등산을 처음 해봅니다,라고 대꾸하려다 관둔다. 우리는 세 시간 반 만에 성판악 코스를 통과했다. 해는 아직 떠 있었고 시계는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라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면 등반인증서를 발급해 준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증빙으로 내야 한다. 그런데 그날은 홈페이지 오류 때문에 현금으로만 인증서를 발급할 수 있었다. 등산하는데 누가 현금을 갖고 다닌단 말인가. 나는 됐다고 했지만 친구는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서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했다. 친구는 자기가 돈을 구해오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조금 이따가 천 원짜리 두 장을 팔락거리며, 아주머니가 그냥 주셨어요! 외쳤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천 원을 그냥? 감사한 마음에 연신 꾸벅거리자, 아주머니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거 얼마나 된다고, 다 같이 힘들게 올라갔다 왔는데! 그렇다. 우리는 하나였던 거다. ‘다 같이’ 오른 것이다. 비록 시작 시간과, 속도와, 몸뚱이는 달랐을지언정 오늘 한라산을 오른 우리는 한 팀이었던 거다!


사람들은 산을 왜 오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산은 가만히 있는데 왜 굳이 그걸 정복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늘에서 누군가가 우릴 보고 있다면 정말 웃기고 귀여울 것이다. 개미들이 커다란 흙더미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영차영차 꼭대기를 향해 가던 개미들이 정상에 올라 야호 외치는 모습.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대한민국 100대 명산 같은 걸 네이버에 검색했던 것이다. 다음 산에 오를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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