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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는 잘 있습니다 Sep 16. 2020

나는 당신과 함께 할수록 점점 뭉툭해집니다


오늘 힘들었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쿨쿨 잠에 빠져버린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오늘 내내 고생한 당신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어요. 그래서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오랜만이죠? 편지로 이렇게 마음을 전하는 건.

3년 전 겨울, 혼자 제주에 왔을 때 용머리해안에 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내가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었나 봐요.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말을 이렇게 기억해주고 이곳에 나를 데려다주어서 고마워요. 그때 문득 제주도의 겨울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었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용머리해안을 향해 꼬박 한 시간을 뚜벅뚜벅 걸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비가 왔어요. 차라리 눈이 내리는 것이 나았을 텐데 말이죠. 눈은 툭툭 털어버리면 되는데 비는 오리털 파카에 달린 모자로는 막을 수 없잖아요.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더 무섭다는 걸 그때야 알았어요. 비에 젖기 전에 용머리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보슬비에 바닷바람까지 겹쳐져 몸이 꽁꽁 얼어버렸고 결국 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근처 카페에 도망치듯 들어갔어요. 거기가 '소자 38 카페'였을 거예요, 아마. 이름 때문에 기대 없이 들어갔었는데 2층에 가니 생각지도 못하게 제주 남쪽 바다가 참 아름답게 보이더라고요. 나는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 생강 라테로 속을 달래며 용머리해안 별 것 없을 거라고 위로했었는데 마시던 차에서 느껴지던 생강의 쓴 맛 때문인지 왠지 더 씁쓸했던 그때의 기분이 지금도 선명해요. 가보지 못했던 그곳이 그 뒤로도 쭉 궁금했어요.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나 봐요. 오늘 당신과 함께 갔던 그곳이. 당신에게는 부끄러워서 말을 아꼈지만 사실, 그곳이 멋져서 행복했다기보다는 당신과 함께라서 행복했어요.



당신은 모를 거예요. 든든한 당신에게 내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차를 렌트하던 당신의 뒷모습이 어찌나 용감하고 커 보였는지 알아요? 내가 말했나요, 3년 전 제주 여행에서 뚜벅이를 자처했던 이유는 겁이 많아서였다고. '허'라는 글자가 써진 차 번호판을 달고 운전하기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도 렌트하는 것이 무서웠어요. 외국어 같은 자동차 보험 용어들도 그랬고,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처럼 겁을 주는 낯선 이들의 말들을 흘려보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나는 틀림없이 그런 불길한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고 여행 내내 걱정했겠죠. 그러나 당신은 그런 말들에 휘둘리지 않았어요. 당신은 네비 속 여자가 길을 엉망으로 알려줄 때도 그렇더군요. 가로등 하나 없어 밤바다와 밤하늘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무서웠던 섭지코지에서도, 제주 향토 음식을 먹어보자며 문을 밀고 들어간 식당에서 각재기국을 앞에 놓고 앉아 도전할 때도 당신은 그렇더군요. 이 모든 순간 당신이 없었다면 그때 그 보슬비처럼 나는 또 불안에 서서히 젖어버렸겠지만 오늘은 신기하게도 당신이 있어 내 마음은 고요했어요.

그러고 보니 '불안'이라는 말을 굉장히 오랜만에 꺼내보네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사나운 바다 마냥 요동쳤었는데 이제는 그때 기억도 아득하게 느껴져요. 맞아요. 그때는 그랬군요. 불안에게 운전대를 빼앗긴 것 같은,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기차에 몸이 묶인 채로 용광로 속으로 빠질 것 같은 느낌. 마치 불안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던 시간들이었어요. 마음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지옥 같아서, 너무 지쳐서 다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주위에는 힘들다 말할 사람이 없었어요.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면 몸이 녹을 것 같았는데 정작 나에게 돌아오는 건, 네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말뿐. 그때 나는 철저히 혼자였죠.

신기해요. 불면증이라는 단어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는 게. 예전에는 새벽에 자주 깨곤 했어요. 딱히 걱정이 있는 것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남은 것도 아닌데. 빡빡한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면 그때부터 무거운 하루가 시작되었죠. 암막 커튼을 들추어 밖을 보면 도로에 차 한 대 달리지 않고, 아파트 앞 단지에도 불 켜진 집 한 곳 없는, 라디오를 틀면 애국가와 함께 '삐이이'소리만 나던 그 새벽이, 나는 사무치게 괴롭고 외로웠어요. 너는 혼자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 당신이 괜찮아 괜찮아하면 정말 괜찮아지고,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하면 정말 잘 될 거 같아요. 나는 그런 당신을 점점 닮아가네요. 당신은 깃털처럼 가벼운 사람이에요. 세상의 근심 걱정에도 가라앉지 않고 둥둥 뜨는. 나는 한없이 무겁기만 한데 말이죠. 그래서 당신이 좋아요. 나와는 다른 당신이. 당신 손을 잡으면 나도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요.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던데. 잠자리가 바뀌어도, 고민거리가 머릿속에 가득한 날에도. 수면유도제나 따뜻한 우유도 이제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처음에는 베개에 고개만 대면 스르륵 잠이 드는 당신이 마냥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이제 당신보다 내가 더 먼저 잠에 드는 날도 많아요. 당신이 언젠가 그랬죠, 불면증 맞냐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못 마셨던 커피를 이제 나도 마시고 있네요.


나는 뾰족뾰족한 나의 모난 점들을 둥글둥글 감싸주는 당신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곧추세운 나를 쓰다듬어주는 당신이, 내 곁에서 한결같이 나란히 걸어주는 당신이 좋아요. 나는 당신과 함께 할수록 점점 뭉툭해집니다. 나를 완전하게 채워 주는 당신.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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