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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리께 Aug 19. 2022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Frankfurt, GERMANY》








- 지금 커피 한잔 어때?

 런던에서 출발한 과테말라시티행 비행기가 프랑크푸르트_Frankfurt를 경유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소현을 떠올렸다. 런던에서 같이 공부했던 그녀는 독어가 능통하지 않았지만 직장을 구해보겠다며 무작정 독일로 넘어 간 당찬 친구였다. 다소 늦은 시각이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고 없는 약속에 그녀도 놀랐겠지만 사실 이건 나를 위한 이벤트이기도 했다. 여행 중의 약속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를 이동시키는 동력이 되거나 느슨해진 여행에 재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반가운 것이다. 들뜬 기분으로 게이트를 향했지만 환승시간과의 간격이 밭아 출국장으로 나갈 수 없다며 제지당했다. 이미 공항에 와있을 그녀에게, 헛걸음시켜 미안하다 했더니 대신 한국 가서 맛있는 밥 사주면 괜찮다고 한다.


- 근데 아쉬워. 오빠 주려고 발포 비타민이랑 승무원 핸드크림도 가져왔단 말이야.

여행하는 나에게 주려고 이것저것 챙겨 온 모양. 발포 비타민은 알겠지만 승무원 핸드크림은 뭘까. 추측해보건대, 손등을 보드랍게 해서 노화를 막아주는 크림 같은 게 아닐까. 승무원은 아무래도 손을 많이 쓰는 직업일 테니 말이다. 모로코에서 수연이 준 하유미 팩도 인기라더니, 요즘은 이름도 희한하고 볼 일이다.




 공항 대기실. 바깥 온도는 영하 4도라고 표시되어 있다. 12월의 눈보라에 엔진이 말썽인지 왼쪽 날개를 녹인다며 한 시간 넘도록 엔진을 돌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분위기다. 이럴 거면 소현과 커피 한잔할 시간 정도는 충분했을 텐데, 아쉽다. 사람들은 낌새를 차렸는지 다들 공항 구석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거나 누웠다. 나는 바깥이 보이는 창 옆에 앉아 배낭에서 책을 꺼내 꼭지를 접어놓은 페이지를 폈다. 작가는 어린 자신과 엄마와의 일화를 털어놓으며, 정지된 과거 속에서만 살아서는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유년기의 상처를 대면하는 일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어른의 힘과 지식으로 보듬는다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고개를 들어 투둑, 투둑 창을 때리며 부서지는 눈비를 바라본다. 우리는 남에게는 관대할지 몰라도 유난히 본인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태도보다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담대하게 인정하고 너그러이 감싸줄 수 있어야만 비로소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유년 시절을 잘 떠올리지 않는 편이지만, 작가의 글 덕분에 이 순간 나의 어린이 시절을 떠올려본다.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들도 많겠지. 보이지 않는 기억 뒤편에 숨어 머뭇거리고 있을 어린 시절의 나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 '여기 프랑크푸르트에, 어른으로 제대로 환승하지 못한 어른 한 명이 있는데 곧 너를 만나러 갈 거야. 그전에 우선 승무원 크림을 잔뜩 발라볼게. 어려지게 하는 크림이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걸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만약 그때의 너를 만나게 된다면... 내가 정말 따뜻하게 안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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