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긴 글을 좋아하지 않지만, 글을 쓸 때면 항상 글이 길어졌다. 짧은 글일수록 쓰기 어렵다던데, 난 할 말을 다 설명해야 하는 스타일이라서 내겐 글솜씨가 없다고 여겼다. 항상. 그래서인지 몰라도 난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시와 소설.
요즘 무기력해지고 지쳐간다. 설렘이 없고 신남과 놀라움이 없다. ‘새삼스러움’이 사라졌다. 내 눈엔 모든 게 흑백이고 그저 잘 때 꾸는 꿈만이 내게 위로가 된다. 계속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꿈속에서 자꾸만 과거의 내가 나온다. 내가 제일 빛났던 시절. 내가 제일 콧대 높았던 시절, 열일곱.
꿈에서 깨면 잠시 두런두런 생각해본다. 대개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서 곱씹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얼마 전, 내 과거에서 ‘새삼스러움’을 찾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억 하나가 ‘핑- 아차!’ 하고 지나갔다. 바로, 내 이름을 불러줄 때의 그 두근거림. 별거 아니지만, 심장이 콩콩 뛰었던 낯선 경험.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야”, “딸!” 혹은 “있잖아” 등등으로 말을 거니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들 빼고는. 문자나 SNS에서는 많았지만, 음성으론 드물었다. 특히 성을 빼고 이름만 불러 줬던 사람은 열일곱 전엔 기억이 없다. 당연히 있긴 했겠지만, 그게 다정함으로 느껴진 적이 없던 거겠지. 그리고 내 이름만 불러줬을 때의 그 푹신푹신한 느낌은, 겪기 전까진 몰랐다.
열일곱. 누군가 나를 “OO아-”라고 불렀다. 거의 항상. 말을 시작할 때 이렇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참 좋았다. 무채색이었던 내게 색을 입혀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걸 까먹고 그동안 난, 전 남친들에게 ‘자기야’ 이런 호칭 대신 이름 불러 주는 게 좋다고 얘기했었다. 하다못해, 어느 순간에는, 그저 내가 다정하게 이름만 불린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보다-라고 여겨버렸다. 희한한 건이렇게 얘기했음에도 전 애인들은 내 이름을 음성으로 불러준 적이 거의 없다. 특히나 지금은 몇 년 전 개명도 해서 더더욱 듣기 힘들다.
열일곱 초반의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몰랐다. 뛰어나고 유명한들, 관심이 없으면 뇌 어딘가엔 있겠지만 기억 속엔 남지 않는다. 그러다 열일곱 초반이 지나고 어느 날 학원에서 이 시를 배웠다. 우선 천천히 눈으로 읽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떨어질락 말락. 코끝이 시렸다, 눈물을 참느라.
그리고 내용이 어딘가 익숙하긴 했다. 아- 노래로 먼저 알았다. <인디언팜 – 꽃>이란 노래를 달콤했던 열일곱 초반에 자주 들었다. 이 노래 가사에 이 시가 인용됐다. 노래를 들을 때만 해도, 내가 그에게 중요한 존재이자 엄청난 존재일 거라 착각했다. 보통은 ‘1’인칭이 되어 공감하면서 노래를 듣는데 이 노래는 달랐다. 가사를 들으면서 ‘맞아, 나 때문에 그는 요즘 삶의 활기를 얻었겠지?’라고 혼자 선을 넘었다.
- 1절 가사 -
니가 내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지
온기를 잃어버렸던 손바닥이었지
메말라버려 갈라진 땅이었지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에게 감사해야겠지
널 만난 후부터 내 맘 다 빼앗겼지
지금 내 감정은 딱 환생이란 노래
엉망의 고백 그때 넌 살포시 안겼네
너에게 내가 괜한 약점이 될까봐
내 주체할 수 없는 감정도 아껴야 되나봐
그래 맞아 꽤 많이도 모난 성격
너에게 제일 먼저 바뀌어야 되나봐
니가 내 이름을 불러줘 비로소 나는 꽃이 돼
메말라버리고 때론 갈라져 거칠게 변한 땅에 단비를 적시네
이젠 내가 네 이름을 불러줄게
여기서 ‘내’를 진짜 '나'라고 감히 헛짚었다. 그가 내게 너무 잘해주고, 특별히 대해줘서 내가 뭐라도 된 양 싶었다. 시를 읽고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시의 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읽을수록 과거의 내가 한심스러우면서 동시에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거의 없음을 인지했다. 그때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줘서 내가 꽃이 되었구나.
내가 무슨 꽃인지 모르겠지만, 꽃도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줬기에 난 행복해하며 꽃이 됐구나.
아무것도 아니던 내게, 그는 참 순수하고도 솔직한 진심을 준거였구나.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가 다시 생각나면서 궁금해졌다. 시는 학교에서 해석한 게 전부가 아니다. 과연 시인 김춘수는 뭘 보고 ‘꽃’이라고 했으며, 어떤 꽃을 떠올리면서 ‘꽃’이라고 한 걸까? 꽃 전체를 뭉뚱그려 얘기한 걸 수도 있겠지만 은연중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을 텐데. 어떤 꽃이었을까. 꽃이긴 했을까? 꽃이 아니었는데 꽃이 된 걸까? 시인 김춘수가 의도한 게 이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난 어떤 꽃이었을까?
너무 궁금하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적어도 그때 그 시절의 나는 꽃이었다. 화려하고 눈부신 꽃이었다. 곧게 목을 쭉 내민 창창한 꽃. 마치 그래, 백일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