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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Sep 02. 2022

남는 건 이야기뿐이다.

 오늘은 10번째 결혼기념일이다. 다시 말하면 결혼 후 10950번째 끼니를 정하는 날이다. ‘저녁에 가족들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케잌에 초를 켜고 스테이크를 썰까?’라는 고민을 잠시했지만 결국에는 아이들이 잘 먹는 된장국, 생선, 감자볶음 등으로 저녁을 먹고 있다. 매끼 별다를 것 없는 메뉴를 정하고 만드는 일에 신물이 나지만 여전히 낭만보다는 실용, 이상보다는 현실을 선택하는데 익숙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창조성은 뱃속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성장을 끝낸 지점에 끝났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전업주부의 일은 대체로 섬세하지만 그다지 스마트하거나 창조적인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실성만으로 대부분이 해결된다. 그리하여 AI가 가장 빨리 도입되는 영역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주부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나는 9살, 7살짜리 딸을 키우는데 내 인생의 4분의 1을 소모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AI가 되어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정도는 15분만에 해낸다. 가성비와 세척력을 두루 갖춘 세탁세제와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좋아할만한 건강한 메뉴 10가지 등의 살림정보는 나의 전산망에 데이터화 되어있다.


 이러다보니 전업주부의 최대의 적이 있다면 매너리즘이 아닐까 싶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청소하고, 요리를 반복하는 AI가 되지 않는 일. 나는 나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어반스케치, 요가, 피아노, 필라테스, 캘리크라피, 여행 등 최신 유행하는 취미활동에 도전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흥미를 금방 잃는 내게 짧아야 2주 길어야 반 년이면 수명이 다하는 것들이다.


 그러던 내가 2년 전 내 이러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생동감을 주는 것을 발견했다. 무료할 때마다 맛집, 교육, 취미에 관한 새로운 아이템을 접하기 위해 검색했던 맘카페에서 보게 된 ‘독서모임’이다.  그 모임을 시작할 당시 나의 마음은 뭔가 아득했다. ‘책을 읽어본지가 얼마나 됐더라?’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나 동화책, 육아서는 질릴만큼 본 것 같다. 하지만 나를 위해 책을 고르고 사고, 읽는 행위를 해본 건 글쎄… 결혼 전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싱글일 때를 제외하곤 없는 것 같다.


 나는 독서모임 참여 의사를 밝힌 후에 서점부터 갔다. 베스트셀러 진열대 위에는 소설, 경제서, 자기계발서 등이 빳빳한 자태로 위용을 자랑했다. 저런 빳빳함도 진열대 위의 갖가지 장르의 책은 모두 낯선 것들이다. 나는 빳빳하기보단 자글자글하다는 표현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간다. 나는 출산 이후로 급격히 노화되기 시작했다. 주름은 이마와 목 여기저기 가릴 것 없이 늘어가고, 눈치를 보며 나던 흰머리도 최근엔 대놓고 생겨나기 시작했다.


 책 제목도 죄다 낯설다. 그래도 이왕 독서모임을 하기로 했으니 장르별로나마 나와의 연관성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가끔 말없고 공감능력이 부족한 남편이 AI가 아닐까 생각한 적은 있는데, 이걸 소설로 쓴다면 아마 판타지나 과학소설 장르가 될 것 같다. 부부싸움과 육아스트레스가 심한 날 왜 나의 지갑은 얇아지는가에 대한 원인을 탐구한 경제서가 있다면 사볼 것 같긴 하다. 결혼 후 경력을 잃고 자기계발과는 담을 쌓은 채 집에 주저 앉아 있는 사람에게 경력도 되찾고 자아성취감도 줄 수 있는 자기계발서가 있다면 한번 책장을 넘겨보긴 할 것이다.    

 

 내가 참여하기로 한 독서모임은 한 가지 책을 선정해서 같이 보고 의견을 나누는 여타 모임과는 달리, 각자가 선정한 책을 모인 자리에서 함께 한 시간 동안 읽고 인상깊은 구절을 필사한 후 그것에 대해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내가 선정한 책은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이나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등 주부 친화적인 작품들이었다. 반면, 다른 회원들의 책은 나와는 궤를 달리했다. 삶의 한복판에서 뜨거운 진실을 위해 싸우고 찾아낸 어떤 사회운동가의 분투기나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성격을 깊이 있게 분석하거나, 우리의 아픈 역사를 찾아내 반성하고 좀 더 민감해질 것을 촉구하는 책 등 주제나 내용면에서 깊고 폭이 넓었다.

 

 내가 지난 10년간 경험한 주부로서의 일상은 닳고 닳은 것이었다. 그것이 가족을 유지하고 지탱해가는 장엄한 것이라고 해도 내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육아와 살림과 부부관계는 대한 이야기는 예상을 벗어나는 것들이 없었다. 내가 유지하고 있는 현 인간관계 속에서는 깊이있게 진행되지 않고, 유의미한 정리없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는 나의 닳고 닳은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나의 육아문제는 심리, 대화와 소통, 교육, 사회, 문화의 영역으로 다양하게 뻗어나갔다. 평소 미뤄두고 하기 싫었던 집안 살림의 문제도 미니멀리즘을 실현한 책을 보면 욕구가 샘솟았다. 남편과의 해결되지 않던 갈등의 부분도 종교서적을 보면 깊이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덧 책리뷰를 SNS에 올리는 걸 즐기고 있었고,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구들을 특정 앱에 올리며 기록하고 싶어했다. 학교나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는 ‘내가 오늘 읽은 책’에 대해서 말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지루한 설교쯤으로 여기더니 어느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오히려 먼저 나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내가 간신히 읽어주던 동화책이 아니라 자발적인 책 이야기에 아이들은 자극받았는지, 책장에서 책을 펼쳐 읽는 횟수가 증가했다. 우리는 일요일이면 식탁에 앉아 한 주에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생각이 다른 의견을 발췌해 토론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나는 독서의 유용성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던 중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서 내건 ‘도서관 봉사활동’ 공고를 봤다. 나는 고민도 없이 도서관으로 갔다. 매일 한 시간씩 도서관에 가서 책을 정리했다. 책을 정리하며 텅빈 도서관을 보다보니 몇 가지 개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육아와 교육을 병행할 효과적인 장소라는 생각 말이다.


 나는 우선 딸의 또래들을 모아놓고 무료로 ‘책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책을 읽어주고 그에 걸맞은 만들기를 하거나 활동지를 작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수업이었다. 예민하고 소심해서 남들 앞에서 인사조차 소리내어 못하는 딸 아이는 엄마가 선생님이 되어 진행하는 수업에서는 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세대는 많은데 프로그램의 인원은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경쟁률이 높아 참여는 어려운데 딸아이와 친한 특정 아이들 위주로 진행되니 형평성을 두고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나는 논란을 무마하기 위해 ‘책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자원봉사자를 여럿 모집한 뒤 연령별, 테마별로 관련 프로그램을 확대해 다수 개설했다.  


 도서관에 아이들과 엄마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집에서 다 본 책을 도서관에 기부하고 싶다는 의견이 나왔다. 도서관의 책은 더욱 풍성해졌다. 나는 주말이면 도서관 플리마켓 활동을 통해 중고책을 나눔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마을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구축하고, 아이들의 인성함양을 위해 ‘어린이 기자단’을 모집해 한달에 한번 아파트의 소식지를 만드는 활동을 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딸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활동에 참여했다.


 가장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은 ‘그림책 만들기’였다. 그림 도구를 가져온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맞게 이야기를 지어서 그림책을 간단하게 만들어보는 활동을 1시간 정도 진행했는데, 육아로 힘들어하는 4~7살 아이 엄마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나의 대가 없는 봉사에 엄마들의 호의가 만만치 않았다. 엄마들은 자신들의 것을 선뜻 내어주었다. 직접 베이킹한 케잌, 유명 음식점에서 사온 반찬, 직접 만든 식탁보, 친정집에서 가져온 농수산물까지…  

 

 오늘은 10번째 결혼기념일이다. 사실 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저녁 식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식탁보는 ‘어린이 기자단’ 활동을 통해 소극적인 아이의 성격을 개조했다고 좋아한 지수 엄마가 직접 한땀한땀 자수를 넣어 만들어 선물한 것이다. 식구들이 가장 잘 먹는 된장찌개는 ‘그림책 만들기’ 활동에 즐겨 참여한 선우 엄마가 유명 된장집에서 구해다 준 된장으로 만든 것이다. 감자볶음은 ‘책놀이 프로그램’의 효과를 녹록히 봤다는 은우 엄마의 강원도 친정집에서 온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 도서관 출입이 잦은 열혈 책육아 중인 소은 엄마는 시댁인 목포에서 가져온 옥돔을 나눠줬다.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맛있는 옥돔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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