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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Dec 13. 2023

아빠의 추어탕과 제피가루

 친정집의 식탁 위에는 제피가루가 담긴 병이 놓여있다. 끼니때마다 거의 모든 음식에 제피를 뿌려 먹는 아빠의 것이다. 아빠는 생선에도 국에도 나물에도 제피를 뿌려 드시는 ‘제피 마니아’다. 저마다의 일로 바쁜 식구들은 아빠가 제피를 좋아하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 식구들이 아빠가 ‘제피 마니아’ 임을 인지하게 된 건, 아빠가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식구들이 함께 먹는 찌개에 제피를 넣는 행위를 반복하면 서다. 제피를 향이 강해 부담스러운 향신료쯤으로 여기는 식구들은 “그 역한 걸 왜 거기에다 넣어요?”라는 타박만 할 뿐이다. “몸에 좋은 거야 먹어봐”라는 아빠의 제안에도 식구들은 미간만 찌푸리며 밥을 먹거나 음식을 나르거나 하는 등 각자의 일에 몰두한다.

 계속된 제안에 맏이인 내가 묻는다. “그게 왜 그렇게 맛있어요?” 아빠는 희미한 웃음만 지으며 “글쎄, 모르겠네. 그냥 맛있어”하신다.

 아빠는 늘 그렇다. 무언가에 대한 이유를 명료하게 정의 내리지 않는다. 모르겠는데 맛있고, 모르겠는데 즐겁고, 모르겠는데 슬프다. 입이 마비될 정도의 강렬하고 자극적인 제피의 맛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세 남매는 이제껏 아빠가 무서웠던 기억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아빠가 화를 낼 때도 있지만 그걸 보는 식구들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넘긴다. 아빠의 분노에는 아무런 무게가 없었다.

 순할 순(順), 업(業)의 ‘순업’이라는 이름처럼 아빠는 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사춘기를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런 아빠가 무섭기보단 만만했던 것 같다. 직장 한 번 오랫동안 다녀본 적이 없는 아빠, 백수 생활이 길고 이직이 잦았던 아빠, 40대 이후엔 엄마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하며 근근이 가장의 역할을 수행해왔던 아빠였다. 느릿느릿 마음으로 행동하는 아빠 옆에서 엄마는 생활고로 지쳐갔고, 날로 억세 졌다. 그런 엄마가 그런 아빠에게 내뱉는 말은 제피의 향처럼 강렬하고 독했다. “아빠라는 사람이 자식한테 해준 게 뭐냐?” 생업이며, 육아를 모조리 떠맡는 엄마의 말을 먹고 자란 세 남매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인가 모를, 타령 같은 말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아빠가 우리에게 해준 게 뭐 있어요?”
               

고된 살육의 과정을 무화시키는 제피가루

 아빠는 40세에 직장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애초에 직장생활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아빠가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진미 추어탕’을 열어 성공한 친척에게서 착안한 사업이었다.

 아빠의 ‘진미 추어탕’ 가게 앞에는 미꾸라지 수 백 마리를 품은 수족관이 있었다. 아빠는 새벽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수산시장에서 가져온 그 미끄덩한 것들을 그 수족관에 옮겨 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미꾸라지를 보기 위해 모여들기도 했지만, 미꾸라지가 끌채에 이끌려 물 밖에서 파닥거리는 것을 보면 이내 질색하며 종종걸음을 쳤다.  
 끌채를 잡은 손은 미꾸라지가 끌채에서 파닥거릴수록 더욱 강력한 반동으로 미꾸라지를 낚아갔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미끄덩거리는 것들을 끌채로 건져서 주방으로 데려간 손은 아빠와 동업을 하게 된 고모의 것이었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미꾸라지의 뼈가 곱게 갈리고 팔팔 끓여지는 살육의 과정을 함축한 공간이었다. 고모는 그곳에서 보기에도 몸서리치는 행위들을 매일 반복했다.

 유통과 생산이 아빠와 고모의 몫이었다면 판매는 엄마의 역할이었다. 엄마는 전에 없던 화장과 미소를 갖추고 동물 냄새 짙은 펄펄 끓는 뚝배기 한 사발을 퍼 날랐다. 식탁 위에는 무청우거지와 뼈째 간 미꾸라지가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놓였다.  

 여느 추어탕 집이 그렇듯 식당의 식탁 위에는 제피병이 놓여있었다. 제피의 독한 향은 비릿한 미꾸라지 향을 없애는데 제격이었다. 제피는 미꾸라지가 추어탕이 되는 과정에 따른 고된 살육 과정을 무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추어탕에 제피가루를 뿌리면 미꾸라지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생존 욕구를 져버린 채 어떻게 끓는 물속에 들어갔는지를 알 수가 없다. 제피는 음식 본연의 향뿐만 아니라 음식 태초의 생김새도 없앴다. 그 진하고 자극적인 특유의 향으로. 제피를 머금은 추어탕이 닿은 혀끝에는 오로지 물컹하고 텁텁한 질감만 남아있을 뿐이다.

 온갖 식자재를 나르는 등의 식당일을 하던 아빠는 그 느린 행동으로 고모와 엄마의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아빠는 묵묵히 식탁에 놓인 추어탕에 제피를 가득 뿌렸다. 아빠의 추어탕에  들어가는 제피 양은 근처에 다른 이름의 추어탕집이 오픈하면서 양이 점차 많아졌다. 추어탕 한가득인 아빠의 뚝배기를 보는 사람들은 "장사도 안되는데 ..."라며 혀를 찼다. 고모는 한 술 더떠 "매상도 적은데 그 비싼 가루를 쏟아붓는다"며 아빠를 나무랐다. 위용을 자랑했던 건 오로지 아빠의 추어탕 위의 한가득한 제피가루였다. 그러던 제피가루마저 어느 날 종적을 감췄다. 제피를 살 돈이 없을 만큼 가세가 기울어지자 아빠의 추어탕집이 문을 닫게 된 까닭이다.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이 유전을 계속해가며 생김새를 바꾸어 거듭 태어나고 죽어가는 인간사의 축소판이면, 제피는 그 인생의 그 지난한 과정을 독한 특유의 향으로 일순간에 생략하는 매력이 있었다. 자신의 조상과 아버지를 생략해버린 아빠의 인생처럼.


뿌리를 생략한 아빠의 부침 많은 인생

 1950년 10월의 어느 날. 경남 진주의 작은 마을에서 아빠는 아버지가 없는 채로 태어났다. 6.25 동란 때 좌우익의 극렬한 대립 속에서 좌익 세력과 결탁한 할아버지가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생을 달리 한 지 불과 5개월 만이다.

 아빠가 태어나기 전 이미 어린 두 딸과 신랑마저 잃은 할머니에게 막둥이 아들의 존재는 각별했다. 형제자매로는 아빠와 14살 차이 나는 손윗누이가 있었지만 아빠가 5살이 되던 해 결혼을 했으니 할머니에게 아빠의 존재감은 말로 표현이 어려울 정도였다. 할머니는 귀하디 귀한 막둥이를 7살이 될 때까지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다녔다고 한다.

 한 집에 형제자매가 너덧은 되던 시대에  할머니와 둘 뿐인 아빠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에서 아빠는 "아빠가 없는 아이"라고 놀리는 친구들과 싸움질하기 일쑤였고, 할머니는 뒷수습을 하느라 학교에 자주 불려 다녔다. 유년기의 아빠는 종종 혼자였다. 낮에는 동네에 살던 친척들과 붙어 다니며 놀았지만 해가 지면 형제들과 무리지어 집으로 들어가는 친척들을 뒤로 하고  홀로 집에 돌아왔다. 아빠의 밤을 지킨 건 동네 책방에서 빌려온 낡은 만화책이었다.

 아빠는 청소년기에 만화책과 한 몸처럼 지냈다. 밤이 새도록 만화책을 읽고 나면 꿈에 대한 열망이 부풀어 올랐다. 아빠는 연필을 어렵게 구해다가 무언가가 그리울 때마다 그리고 또 그렸다. 할머니 옆에 할아버지를 그리고, 아빠 옆에 할아버지를 그리다가 지웠다. 때론 시집간 누이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 자리에 모이는 꿈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실제의 자신보다 더 우람하고, 강인한 남성의 모습을 그리며 잠이 드는 날이 잦았다.

 아빠는 10대의 대부분을 친척이 알선해 준 종이공장에서 일하며 보내다가 20세가 되던 날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간 곳은 고독한 10대를 버티게 해 준 한 유명 만화가의 집이었다. 아빠는 만화가의 집 앞에서 “제자가 되고 싶다”며 며칠을 기다렸다. 보다 못한 집주인은 문을 열었고, 아빠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기뻐할 사이도 잠시, 일은 고됐다. 아빠는 월급도 받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며 보조 작업을 하는 날이 많았다. 눈은 쾡해졌고, 튀어나온 광대는 더욱 확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175cm의 아빠는 53kg이라는 인생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다. 건강을 잃어가면서 고향에 두고 온 노모에 대한 그리움도 커져갈 즈음이었다.

 6개월. 낯선 땅에 홀로서기를 한 아빠에게 그리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막내아들을 보내고 맘 편할 날이 없던 할머니는 그리움에 지쳐 봇짐 하나를 들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하지만 고향에서 홀어머니가 떠났다는 연락을 받고 밤잠을 설쳤던 아빠는 그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아빠가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지는 악몽을 꾸던 날, 기적적인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가 동대문 경찰서에 있다는 것. 문맹인 할머니가 아빠의 연락처를 잃어버리고 나서 경찰서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지나치게 무뚝뚝하고 담담해서 둔하다는 얘길 곧잘 듣는 아빠는 이날 생전 처음으로 노모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아빠의 사회생활은 부침(浮沈)이 많았다. 무명 잡지나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곤 했지만 월급을 밀리는 걸 참다못해 그만뒀다. 입에 풀칠하려고 일용직을 전전하기도 했다. 안정적인 생활이 그리워서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반복적이고 루틴 같은 업무도 아빠의 적성이 아니었다. 운 좋게 대기업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며 일본 출장을 가기도 했지만, 누군가와 쉽게 섞이거나 융화되지 했던 아빠는 상사의 구박을 못 이겨 끝내 관뒀다.

 결혼 후에도 유랑의 삶은 계속됐다. 할머니와 그녀의 귀한 아들과 같이 사는 엄마의 고생도 계속됐다. 엄마는 타박과 잔소리를 내뱉는 힘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잔소리가 없는 날엔 엄마의 긴 한숨으로 채워지는 날이 많았다.

 엄마는 아빠의 다른 것은 모조리 부정해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격은 인정했다. 아빠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와도 이제껏 난동을 부린 적이 없다. 아빠가 술에 취해서 한 말이 있다면 “아빠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아무도 내게 나의 족보를 알려준 사람이 없다” “나의 뿌리가 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정도였다. 나는 이제껏 아빠에게 ‘아버지가 그립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빠는 그토록 사무쳤을 그 말을 금기어처럼 아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어요?”

“아빠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아요?”

철없던 시절 나는 무심코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마다 아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모르지. 모르겠어.”     


제피, 일생의 고단함을 한 순간 마비시키는 힘                                   

 아빠의 나이는 어느덧 70세가 넘었다. 턱밑에는 희끗희끗한 수염이 돋아있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여러 줄 새겨있다. 얼굴과 몸 곳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점들이 불균일하게 박혀있다. 그 점들은 산속에서 자라며 햇빛과 물의 성분이 응축된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를 연상케 한다.  

 마음을 다스릴 때마다 고향인 경남 진주에 내려가서 제피나무를 찾던 아빠는 몇 년간 고향을 찾지 않고 있다. 제피나무가 많던 아빠의 고향에 죽음이나 이사 등의 이유로 오랜 친척들이 사라져 간 탓이다. 옛집은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고, 한 평생 아빠만을 의지하던 할머니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지금 진주에 남아있는 건 아빠의 유년과 청소년기를 지탱했던 기억 몇 조각들이다.  

 몇 년간 고향을 찾지 않은 사이 아빠는 집 근처에 있는 나즈막한 산을 자주 찾는다. 이웃사촌에게서 제피나무가 다량으로 재배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나서다. ‘초피’의 경상도 방언인 제피는 초피의 나무껍질을 일컫는 것이다. 딱딱한 초피의 껍데기를 씹으며 아빠가 누렸던 건 무엇이었을까? 과거와 현재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일시적인 마비가 아닐까? 초피의 독한 맛은 밥벌이에서 오는 치욕을 한 순간 잊게 하는데 특효이지 않았을까?

 이제 추어탕을 운영하던 당시의 아빠의 나이가 된 그의 자녀들은 “아빠가 해준 게 뭐 있어요?”라는 오래된 타령에 대해, ‘주고 싶어도 줄  없다’며 침묵으로 답하는 이의 고통을 조금 알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아빠가 그 시절 추어탕에 가득 뿌린 제피의 맛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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