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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혜 Aug 16. 2023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거짓말

(1). 착한 남자 콤플렉스

        S는 걸음걸이가 착한 남자였다. 큰 키에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올 때 그의 걸음은 유난히 명랑하고 순수했다. 아기처럼 흰 피부를 가진 그가 눈웃음을 칠 때면 웃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 주변을 환하게 했다. S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참 착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참 착한 사람. 그게 S의 문제였다. 그의 "착하기만 한 성격"때문에 K는 자신이 방황하게 될 줄은 몰랐다.     


      K와 S는 고등학교 때 만났다. H고등학교는 이 근방 유일한 남녀 공학 고등학교다. 1학년 때 K는 S를 만난 적 없다. 나중에 K는 왜 자신이 S를 1학년 때는 만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분명 마주쳤을 법도 한데 이상했다. K는 선생님 심부름으로 음악실에 갔다가 교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자반과 남자 반은 11반을 경계로 나뉘었다. 1반부터 10반까지는 남자 반이었고 11반부터 17반까지는 여자 반이었다. 10반과 11반 사이를 지나가는데 저만치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S와 마주쳤다. 그때 K는 알았다. '저 사람과 나는 또 만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걷다가 그만 안내문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얼굴이 빨개져서 안내문을 주우려고 하는데 훅하고 S 쪽으로 날아갔다. S는 안내문을 K에서 주면서 말했다.     


     “이거 떨어트리셨죠?”     


     K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떡 숙이고 인사를 한 뒤 도망치듯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로 들어와 안내문을 교탁 위에 올려놓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자리로 돌아가서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K의 표정은 뭔지 모르게 오묘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웃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S를 모른단 말이야? 우리 학교에서 유명한 애야.”


    여학생들의 시기 질투가 심해서 S와 말이라도 한 날엔 전교에 소문이 퍼진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S는 다른 학교에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여학생들은 S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그때부터였다. K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모든 이미지를 S에게 투영시키기 시작했다. 실제 S가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S는 완벽한 사람이어야 했다. K는 자신의 환상 속에 S를 집어넣고 자신이 그린 그림 안에서 자라고 있는 S의 모습을 좋아했다. 풋사랑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완벽함”이 만들어 내는 환상 때문이다. S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K는 S를 만나면 주려고 교복 주머니 속에 초콜릿 한 개, 비스킷 한 개, 그리고 알록달록한 풍선껌을 예쁜 봉지에 담아서 카드에 “간식 사용 설명서”를 썼다.     


     <간식 사용 설명서. 다음의 순서대로 따라 하세요.>     

     1) 깨끗하게 손을 씻는다.

    2)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간식을 먹는다.

     3)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4) 눈을 뜨고 하늘을 한번 본다.

    5) 당신은 이제 행복한 사람이 된다.     


    일주일 내내 교복 주머니 속에 간식을 들고 다녔지만, S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독서실에 가려고 승강기를 타는데 S와 마주쳤다. 순간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이거…”

    “뭐야?”

    “너 주려고 만든 거야.”     


      얼굴이 빨개진 K는 도망치듯 독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던지 책상에 앉아서도 한참은 진정이 안 됐다. 친구 Y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계속 킥킥거렸다.   

  

     “주고 왔어?”

     “응 주고 왔어.”

      “뭐래?”

      “몰라”

     “왜 몰라”

     “던져주고 빨리 와버렸어.”

     “에이 바보”     


      그 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S가 답장을 보낸 것이다. 중고등 학교 시절, 남녀공학 학교에 다녔던 K는 남자친구가 제법 많았다. 그중에서 죽마고우인 J는 거의 가족과도 같은 사이였다. 과외 공부도 같이하고 아침마다 산도 같이 다니고. 서로 고민이 있으면 나누기도 하는 사이. 게다가 초, 중, 고를 다 같은 학교에 다녔으니 얼마나 친했는지는 짐작하는 그대로다. K는 J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게 S라고 말했다.     


     “이거 전해주고 와.”     


    사랑의 오작교처럼 J에게 편지를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S가 이거 너 갖다 주래.”     

 

    편지를 열어보니 그림도 예쁘게 그려져 있고, 누가 봐도 정성 들여 쓴 편지다. 그리고 겨울방학을 얼마 앞두고 S는 K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스쿨버스에서 내려서 집에 가려는데 S가 K를 불렀다.


    “이거 선물.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가 선물한 노란색 예쁜 목도리가 따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S가 보인 호의는 착한 남자로서 보인 단순히 친절인데, 그걸 착각하고 오해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이런 S의 친절이 K를 더 설레게 했다. K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 근교의 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S가 대학에 떨어져서 기숙학원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렇게 둘의 인연은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계속 갈 인연은 누군가가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붙잡는다고 해서 붙잡히는 것도 아니다.     


     열아홉 살. K는 지금 다니는 대학교가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다시 공부하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에 멀리 수원까지 가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S였다. 기숙사 학원에 들어갔단 소문이 들렸었는데 S가 내 앞에 서 있는 거다. K는 수줍고 놀라서 말도 못 하고 빨개진 얼굴로 서 있었다. 말을 먼저 건 사람은 S였다.     


      “학교 가는 거야?”

      “응. 너는?”

     “학원.”

     “아…. 그렇구나.”

    “혹시 나랑 같이 학원 다니면서 공부하지 않을래?”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K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큰 돌멩이가 쿵쿵거리면서 심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학교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내내 생각했다. “S랑 학원에 다니면 맨날 같이 있을 수 있겠지? 아냐 분명 나는 저 남자가 너무 좋아서 공부도 못할 거야” 마음속에서는 S가 한 말이 맴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넌 안 돼. 절대 안 돼”라고 스스로를 짓눌렀다. 결국 K는 S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다.     

      

    시간은 흘러갔다. S에게 이메일이 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이메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늘 먼저 연락하는 쪽은 K가 아니라 S였다. 자신은 군대에 있다고. 면회 한번 올 수 있냐고. 놀랍고 반가웠다. S는 K에게 호감과 친절 그사이의 경계를 오가면서 맴돌았다. S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에 가던 날. S는 작가인 K가 멋있다고 했다. 항상 K에게 예쁘다는 말은 안 해도 멋있다는 말은 자주 했다. 둘은 서로의 꿈에 대해 한참 얘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뭔지 모를 허탈감이 느껴졌다. S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왜 나에게 이런 호감을 표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S는 너무나 착한, 그러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막상 K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거나 관계의 발전을 위한 몸짓을 취한 적이 없다. 마치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보면서 코스모스가 예쁘다고 꽃송이를 만지지만 꽃이 예쁘다며 물을 주거나 시든 꽃을 잘라버리는 수고는 벌이지 않는 것처럼. 왜 저 남자는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까. K는 난감했다. “나를 갖고 노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S는 너무나 호의적이고 친절하다. 이 남자의 진심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K의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해갔고, 새로운 연애를 했다. S는 K의 마음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K가 S를 다시 만난 건 영국으로 유학하기 전이었다. 스물여섯, S는 스물일곱 살. 그들은 같이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S는 예전과는 좀 다르게 K를 봤다. 적어도 K의 눈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너는 남자들이 원하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야.”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와. 기다리고 있을게.”     


    갑자기 아리송한 얘기들을 꺼내 놓는 S의 말에 K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웃었다. 그 당시 만나는 남자가 따로 없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S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저런 말들을 할까? 예전에 했더라면 좋았을 것 아닌가?’ 역시 인연이 아닌 걸까’     


    K는 S 앞에서 청아한 코스모스가 됐다. 흔들흔들 바람이 부는 대로 긴 꽃줄기가 흔들렸다. 하지만 코스모스 꽃이 꽃대만 흔들릴 뿐 꽃이 흔들리지 않듯이 K의 마음은 요동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둘은 이렇게 또 아무런 약속도 관계의 발전도 만들지 못한 채 헤어졌다.  영국으로 떠난 K는 반년도 채 안 돼서 S에게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다음 달에 결혼해”     


    왜 미안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 약속도 한 적 없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그들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유학을 다녀온 뒤 반년쯤 지나 S에게 연락을 했다. S는 왜 이제 연락했냐며 화를 냈다.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했어야지”     

 

     그러게 말이다. 연락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K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 만나자”     


    만나자는 S의 말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K는 더 이상 S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철 아름답게 피고 떠나는 코스모스는 내년을 위한 뿌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내년이 되면 또다시 심어야 하는 게 코스모스다. 하지만 K는 S를 마음에 심지 않았다. 그저 한때 아름다웠던 순결과 순정의 꽃, 코스모스 같은 기억만 남겨뒀을 뿐. 그 이후로도 K는 몇 번 S를 만난 적 있다. 이미 결혼한 S는 예전보다 여유가 있어 보였고, 안정돼 보였다. 반면 K는 전보다 더 불안해 보였고,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어쩌면 우린 또다시 몇 년을 만나지 못하겠지. 우연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S를 떠올렸다. S는 K에게 상처를 준적도 그렇다고 사랑을 준적도 없었다. 늘 K를 웃게 해 줬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해 줬다.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경계를 단 한 번도 넘어보지 않고 그 선을 지키면서 지난 30년을 함께 보내온 S와 K. 마치 얇은 플라스틱으로 된 다리를 건너듯, 깨질까 무너질까, 걱정하면서 다리를 건널 시도조차 못 했던 그들. 한 걸음만 용기를 냈다면 S와 다른 관계 선상에 놓여있겠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첫사랑과의 이별은 편도 티켓을 끊은 기차여행과 같다.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차에 오른다. 떠나가는 사람도 기차를 보내는 사람도,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다. 그렇게 이별 기차는 서로에게 생채기와 미움,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간다.     


      딱 한 번 K는 S와 나란히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적이 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말없이 조용히 서로의 숨소리만 들었다. 한 발짝만 앞으로 가면 손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두 사람 모두, 용기 내지 못했다. 그 긴 돌담길을 한번 왔다 되돌아갔지만 돌담길을 걷는 둘의 거리만큼 마음 거리도 딱 그만큼이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그렇게 그 밤, 두 사람은 천천히 길을 빠져나왔다. 생각해 본다. 이제 S의 친절과 웃음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는 손을 잡을 수 있고 마주하며 함께 안을 수 있는 진짜 사랑을 꿈꾼다. 착한 남자는 너무 착해서 매력이 없다. 착한 것보다 용기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제 또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가 피겠지. 코스모스 길을 걸으면 하늘하늘 흔들리는 꽃처럼 너의 미소가 떠오르겠지. 그 길을 다 걷고 지나칠 때쯤이면 너를 잊을 것이다. 사랑하는 S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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