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늬만 바람둥이
K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이른바 자신만의 이상형을 만들었다. 내가 좋은 학교를 못 갔으니까 무조건 좋은 학교에 다니는 똑똑한 사람을 만나자. 머릿속엔 온통 그뿐이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상대가 이뤄 주길 바랐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H는 S대학교 항공우주학과 학생이었다. 작은 키에 보통 체격, 주걱턱에 안경을 쓴 H는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잘난 척거렷다. 게다가 매사에 나서서 가르치려 들었다.
“공부 잘하면 됐지. 뭐”
H의 주걱턱도, 작은 키도, 잘난 척 거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S대학교에 다니는 똑똑한 친구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았다. 마치 자신이 S대학교에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K는 H가 다니는 학교에 자주 갔다.
“실험실도 뭔가 근사하다. 여기서 뭘 해?”
“로봇도 만들고 프로그램으로 비행기 제작도 실험하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H에게 반했다. 점심시간에 학교 구내식당에 갔다. K는 마치 자신도 H 학교 학생인 것처럼 우쭐했다. 하지만 K가 S 학교를 즐길 수 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H가 점차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무슨 책 보고 있어?”
“미국 항공 우주국에 대한 책”
“와 신기하다. 무슨 내용인데."
“러시아가 1957년에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에 성공한 걸 보고 미국이…”
“응 미국이 왜?”
“됐다. 말해 줘 봐야 네가 뭘 알겠어.”
늘 이런 식이었다. 매사에 나서서 아는 척, 잘난 척을 해야 속이 시원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내가 돈을 얼마 썼지? 내가 너보다 많이 썼나.”
H는 자신이 K보다 돈을 많이 썼을까 봐 늘 초조해했다. 데이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런 셈을 했다. K는 점점 H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는 게 도대체 왜 중요한지, 그리고 항공우주에 대한 지식이 왜 모든 일상을 지배해야 하는 건지. H가 잘난 척 거릴 때마다 그의 주걱턱은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안경은 그의 눈을 더 매섭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둘은 계속 교제를 이어갔다. 처음으로 연애를 하는 K는 어떻게 이 관계를 끝내는지 혼란스러웠다. 이 무렵 H는 K에게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H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른 여자를 만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게 맞는 건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수긍해야 하는 것인지. 그사이 둘 사이 문제는 다른 쪽으로 불거져 갔다. 어느 날 H는 K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랑 자고 싶어”
이제 겨우 19살인 K는 이런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K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쉽사리 멈추지 않는 눈물. 하지만 H는 냉정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널 만나고 싶지 않아”
이 말을 하는 H의 주걱턱은 피노키오의 코처럼 여느 때보다 더 밑으로 길어졌다. 만나지 않겠다고? 그런 이유로? H가 내게 원하는 건 결국 이거였어. 내가 바라는 잘난 학교에 다닌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렇지만 어떻게 이 관계에서 나올 수 있지?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H는 먼저 이별을 통보했다.
“헤어지자. 난 더 이상 널 만나고 싶지 않아”
일방적인 이별 통보 후 H는 K에게서 멀어졌다. 분명 H가 별로란 걸 머릿속으론 알고 있는데도 힘들었다. 이별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별 다음은 뭐지. 난 뭘 해야 하지. 이렇게 마음 아픈 시간이 일주일이나 흘렀을까. H는 K에게 삐삐를 쳤다.
“할 말이 있는데 전화 좀 부탁해.”
H는 황당한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얼마나 힘든지 궁금해서 연락해 본 거야. 내가 없으니까 힘들지?”
슬펐던 마음이 스펀지처럼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간 것은 그즈음이었다.
“아니 하나도 힘들지 않아”
K는 거짓말을 했다. 힘들지 않다고, 괜찮다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K 앞에는 또 다른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H였다.
“할 말이 있으니까 한 번만 꼭 만나자.”
어떻게 할지 고민조차 안 하고 H를 만나러 갔다. 그 없이도 잘 사는 모습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다.
“너 그 자식이랑 사귀는 거야?”
“네가 알 필요 없잖아.”
“그 자식이 잘 해주냐?”
“그럼. 얼마나 비교나 되는지 알아? 예쁜 인형 갖고 싶다고 했을 때 넌 돈 아깝다고 했었지? 걔는 나한테 커다란 인형도 선물해 주고 장미꽃다발도 사줬어.”
갑자기 당황한 듯한 H는 전에 없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깟 인형 난 백 개도 사줄 수 있어.”
우스웠다. 함께였을 때는 짠돌이처럼 굴더니, 심지어 자기가 날 차버렸으면서 지금은 이렇듯 비겁하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니. K는 피식 웃었다.
“앞으로 바람둥이로 살 거야. 이 여자 저 여자 막 사귀면서.”
“그러든 말든. 네 맘대로 살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이 말까지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에게 계속 지고 있다가 갑자기 단방에 승리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둥이란 말이 어쩐지 H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K를 찾아와서 제발 돌아와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 바람둥이처럼 살았을까? 함께 간 춘천에서 H는 K보다 더 서툰 키스를 하며 “오늘 널 갖고 싶어.”라는 말만 했을 뿐,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바람둥이로 사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K는 H를 그렇게 나쁜 인간으로는 기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S대학교만 보고 그와의 교제를 허락한 나에게 더 큰 문제가 있지.”
H는 원래 그런 사람인 거다. 잘난 척 거리고, 짠돌이고, 입으로라도 위대한 사랑의 관문들을 다 넘고 싶은 그런 인간상인 거다. 이런 그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K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S대학교에 다닌다는 단편적인 사실 말고, 여러 가지 다른 면도 살폈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좋아해도 늦지 않았을 거다. 그저 이제 기억나는 건 유난히 길었던 그의 턱과 그가 갖고 있던 “항공우주”에 대한 큰 로망뿐. 지금 어디선가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 사람에게도 “나는 바람둥이가 될 거야”라며 위협 아닌 위협을 하고 있을까. 카페에서 나오면서 K는 딱 한 번 뒤를 돌아봤다. H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K는 H와 눈이 마주칠까 봐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리고 카페 문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든 결국에 가서는 모두 같은 얼굴로 슬퍼하고 좌절한다. 그가 S대학교에 다니든 안 다니든 인간의 감정은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게다.
그 후로도 몇 번 H는 전화했다. K는 받지 않았다. 생각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그리고 더 이상 현재의 삶 속에서 그를 추억하며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오던 날 문자 한 통이 왔다.
"이제 정말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거야. 잘 살아. 널 잊을 거니까."
K는 답장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이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듯이 이별도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H와의 사랑이 끝났을 때 K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골치 아프게 앓던 이를 뽑아버린 것처럼. 마음을 모두 닫아버리고 되돌아서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닫으면 어느새 바람이 스미듯 마음 안에 그리움이 들어왔다.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한구석은 슬픔이 차올랐다. 그는 자꾸 마음 한편에서 맴돌았다. 울고 있던 마지막 모습 그대로. 원망과 미운 마음은 어느새 저만치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그의 모습 위로 긴 주걱턱이 슬프게 기억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