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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in Nov 29. 2020

아홉 번째 달리기가 하프 마라톤

버추얼런이라고 들어는 봤나? (Feat. 2020 손기정평화마라톤 대회)

21.0975km. 내 아홉 번째 달리기는 하프 마라톤이었다. 그게 어떻게 된 이야기인진 그렇게 길게 거슬러가지 않아도 된다.      



마라톤까지 D-27


어느 날, 친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언니. 나랑 마라톤 나가지 않을래? 하프!”


갑자기 마라톤이요...? 그것도 하프요......? 요즘 언택트 마라톤이 유행인지 SNS에서 종종 마라톤 인증을 보곤 했다. 하지만 내가 본 건 대부분 5km나 10km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프 마라톤이 정확히 몇 킬로 인지도 잘 몰랐다. ‘42.195를 반으로 나누면 얼마지’를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하고 있는데 동생은 몇 날 몇 시에 하고, 기념품으로 뭘 주는지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평생 달리기라곤 중고등학생 때 했던 체력장 오래 달리기가 전부인 사람한테 마라톤은 그 이름 자체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존재다. 그리고 마라톤을 하려면 지금부터 달리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당시 내겐 그럴 시간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당연히 “안 해”를 외쳤다.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먹을 걸 좋아해 식품영양학과를 선택했을 정도다. 이런 나에게 다이어트는 평생 따라붙는 숙제였다. PT 횟수만 100회를 찍었다. ‘이 시국’이 찾아온 뒤론 꾸준히 홈트를 했다. (유튜브 Chloe Ting 채널의 2주 복근 챌린지) 체력적으론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마라톤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내게 지구력이라고 부를 만한 힘은 전무했고, 그동안 잠재웠던 폐활량을 깨워내 지구력을 기를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동생은 제법 실망한 듯 시무룩하게 전화를 끊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대신 파이팅 가득한 응원을 남겼고 그렇게 마라톤은 내게서 잊힌 듯했다.      



마라톤까지 D-21          


뜻밖에 첫 번째 달리기가 시작됐다. 평소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옆 학교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곤 한다. 크게 노래를 들으며 열 바퀴쯤 멍하니 걷다 보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머리가 맑아진다거나 갑자기 해답을 얻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난 그걸 깨닫으려 운동장에 갔다. 바뀌는 건 없지만 그래도 돌고 돌아오면 어느 정도 할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똑같은 지점의 똑같은 고민이 내 머릿속을 복잡스럽게 만든 날이었다. 회피한다고 유튜브만 들여다보단 정말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나온 운동장엔 제법 사람이 많았다. 특히 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둘셋씩 짝지어 운동장을 도는 사람들 옆으로, 홀로 묵묵히 뛰는 사람들이 보였다. ‘자유로워 보인다.’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는 그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선선한 바람과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린 데서 오는 자신감 덕분일까.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뛰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 다들 달리는구나’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여전히 바뀌는 건 없었지만 뛰는 동안 정신이 맑아졌다. 해답을 얻진 못했지만, 해답을 구할 의지가 생겼다. 난 달리기와 제법 잘 맞는 사람이었나 보다. 왠지 앞으로도 쭉 달려야만 할 것 같았다. 고작 한 번 달린 러너치곤 과하게 기합이 들어갔지만 그만큼 새로운 기분이었다. 하프 마라톤이 내 달리기 인생의 화려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오자마자 ‘2020 손정의평화마라톤대회’ 참가 신청을 했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난 달리기 인간이었어’라며 참가 신청을 알렸다.   



마라톤까지 D-18


3주가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초보 러너에게 필수 어플이라는 '런데이'를 깔았다. 하루에 30분씩, 일주일에 세 번을 시키는 대로만 뛰면 8주 후에는 쉬지 않고 30분을 달릴 수 있다고 했다. 달리기도 어플이 알려주다니, 좋은 세상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1. 격일로 달리기

2. 세 번째 달리기부터는 2코스씩(30분+30분) 달리기

3. 마라톤 있는 주부턴 3코스씩 달리기

4. 마라톤 당일 전까지 8주 코스 끝내기      


지금 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계획이지만 당시엔 너무나도 말이 되는 계획이었다. 아니, 하프 마라톤 완주를 위해선 말이 되게 해야 하는 계획이었다. 완주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나서 ‘난 역시 계획을 잘 세운다’며 운동화 끈을 꽉 묶었다. 두 번째 달리기이자 런데이 기록에 첫 번째 도장을 찍으러 갈 시간이었다.


런데이 어플의 코치는 좋은 목소리의 남성이었다. 코치는 새로이 러너가 된 나를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달리는 내내 달릴 수 있다는 용기와 응원을 끊임없이 귀에 속삭였다. 또 달리는 나 자신이 얼마나 멋진지에 대해 주입식으로 교육시켜주었다. 달리기보다 걷는 구간이 많았던 덕분에 수월하게 첫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달리기가 점점 더 좋아졌다.


나는 주로 밤 열한 시 전후로 달렸는데, 하루 종일 그 시간이 애타게 기다려졌다. 원래 하던 운동에 달리기까지, 거의 두 시간이 걸렸지만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할 일을 일찍 하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여유가 없던 마음에 조금씩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공간을 오롯이 달리기로 채워 넣었다.



마라톤까지 D-10  


고비는 예상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다. 1분씩 뛰던 달리기가 1분 30초, 2분을 넘어가더니 2분 30초를 연속으로 뛰어야 했을 땐 서서히 숨이 차기 시작했다. '21킬로를 뛰어야 하는데 고작 이 정도로 힘들다니...' 힘들게 2분 30초씩 뛰고 걷고를 반복했을 때도 30분 동안 4Km밖에 뛰지 못했다. '이걸 다섯 번을 반복해야 한다고...?'  갑자기 21.0975라는 숫자가 현실로 다가왔다. 무식해서 용감했다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졌다. 다섯 번은커녕 두 번도 반복할 수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달린다고 이게 될까.


쌀쌀해진 날씨와 딱딱하게 굳은 운동장 흙바닥도 한몫했다. 달리기가 고되지니 핑계가 늘어났다. 오늘은 추워서.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오늘은 왠지 발목이 아픈 것 같아서... 마라톤은 가까워져 오는데 도장은 3주 차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지 뭐'


역시 이번에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가. 생각해보면 난 항상 그랬다. 지구력 부족은 내 체력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마지막에 힘을 빼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워서다. 이대로 전력을 다해도 실패할까 두려워서,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게 무서워서, 내 최선의 한계를 확인하기 싫어서 상처 받기 전에 그만둬버린다.


이번엔 핑계도 좋았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 러너, 과도한 목표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까지. 지금 그만둬도 충분히 합리적인 포기가 될 수 있었다. '그래, 첫 대회니까 마음 편하게 10Km를 목표로 달려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버추얼 런이라 언제 어디서 멈춰도 티도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놓였다.




마라톤까지 D-5


마라톤 본부에서 택배를 보내왔다. 생수와 에너지바, 에너지 음료, 책자, 러닝백, 기념품인 블랙야크 조끼 그리고 메달. 자신이 뛰고 싶은 곳에서 자유롭게 뛰는 시스템이라 미리 기념품과 메달을 보낸 것이다. 메달에 적힌 21.0975 완주를 보는데, 작은 메달이 참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까지 반갑지 않은 택배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택배는 참 반갑지 않았다. 메달과 기념품을 제대로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구석에 방치해놓았다.



D-DAY


드디어 D-DAY. 친한 동생과 또 다른 친구 한 명과 9시 30분까지 강변역에서 보기로 했다. 눈을 뜨니 8시였다. 늦었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러닝백에 물과 에너지바, 렌즈 등을 쑤셔 넣었다. 신발에 발을 꾸겨 넣은 뒤 나 홀로 일찍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따라 마을버스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라톤 시작 시간인 10시 10분 전에 도착했다.


역에서 한강 둔치까진 10분이 넘게 걸렸다. 어쩔 없이 한강 다리 위에서 마라톤을 시작했다. 열심히 플레이리스트를 짜려고 했는데 그럴 시간 따위 없었다. 그냥 재생목록에서 가장 신나는 노래였던 'NCT-無限的我(무한적아;Limitless)' 반복 재생시켰다.


그래도 한강에서 달리는 기분은 남달랐다. 딱딱한 흙이 깔린 운동장과 달리 고른 트랙이 깔린 한강은 비교할 필요 없이 최적의 달리기 환경이었다. 마라톤 참가자들도 제법 많았다. 기분 좋게 달리는데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무리가 우렁차게 "파이팅" 외쳤다. 순간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마스크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  맛에 다들 마라톤 나가는 건가' 엉망이었던 아침도 잊고 다리에 몸을 맡겼다. 잔잔한 강물과 파란 하늘, 활기 넘치는 사람들이 모두  폭의 그림 같았다.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제법 즐거웠다.


여유로움도 잠시, 금세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4Km쯤 갔을 땐, '이거 10Km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Km로 많이들 시작하던데...'라며 나와 타협하려는 순간, 집에 있는 메달이 떠올랐다. 참가 기념 메달도 아니고 완주 메달이었다. 이미 받아버린 메달을 생각하니 멈출 수 없었다. 잠시 걸으며 숨을 고른 뒤 다시 뛰었다.


어차피 지금 내 실력에 멈추지 않고 뛰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특기인 작심삼일 기법이다. 무한적아 노래에 맞춰 후렴구가 나오는 부분에만 뛰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노래에 맞춰 뛰었다. 걷다 뛰다를 반복하다 보니 달린 거리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Oh baby it’s you
이제 시작이야 무한의 나
동의 처음과 서의 끝쪽부터
빛은 암흑 속 퍼질수록 강해져 가
눈을 떠 봐 오
점점 커져가 나의 노래가
봤니 뜨겁고 터질듯한 세계
들리니 우리는 하나가 돼
Baby I don’t want nobody but you
Ho, ho, wake me up,
thirsty, thirsty for love
Wake me, wake me up,
thirsty, thirsty

                                                                                                'NCT-無限的我(무한적아;Limitless)'

놀랍게도 난 완주에 성공했다. 대단한 기록은 아니지만 뜻깊었다. 내 최선의 가능성을 본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메달을 목에 걸어봤다. 한결 가뿐했다. 수많은 포기의 순간에서 날 끄집어낸 것치곤 너무 가벼웠다.



Limitless. 그동안 내가 정한 내 한계에 갇혀 살아온 건 아닐까. 30초 러닝이 수십 번 반복되니 21.0975Km가 되었다. 작심삼일이 열 번 반복되면 한 달이다. 그 한 달이 다시 열두 번 모이면 1년이다. 올해도 수 십, 수 백 번의 작심삼일들이 반복된 나날이었다. 열한 번의 달이 지난 지금, 난 어디쯤 와있을까. 뛰는 동안 수 십번 반복했던 NCT의 노래 제목처럼 거창한 계획이 없더라도, 대단한 동기가 아니더라도 우선 내가 목표한 도착점에 깃발을 꽂고 봐야겠다. 마지막 1Km를 전력질주했듯이, 남은 한 달 후회 없이 달려야겠다.  




D-DAY +...

작심삼일 기법으로 완주를 해낸 뒤, 난 자랑스러운 메달과 절뚝거리는 다리를 얻었다.(운동화 끈을 꽉 묶지 않았기 때문...)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다음 날 중요한 스케줄에 불참해야 했다. 일주일을 절뚝거리며 정형외과에 들락날락거렸고, 예정된 스케줄도 모두 꼬였다...^^ 결과적으로 미련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리가 완전히 나으면 다시 달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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