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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철원 Apr 02. 2023

내 안을 채우는 삶

내 삶에 내가 빠져있으면 외부의 것들로 나를 채운다.

내 삶에 내가 빠져있으면 외부의 것들로 나를 채운다. 




학부생 시절, 내 목표는 학점 4.0이었다. 군 제대 직후 학점이 2점이 채 되지 않았으니 엄청나게 높은 목표를 설정했던 셈이다.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거의 모든 과목을 재수강하면서 여름에는 계절학기를 들으며 공부만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나는 4.0을 달성하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표만 달성하면 훗날 과거를 되뇌었을 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한 나는 졸업학점 4.0을 받았다. 정확히는 4.01이었다. 스스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학점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럼 내가 어느 정도 성취감을 느꼈을까? 사실 성취감 보다는 허무함이 컸다. "내 지난 4년은 뭐였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졸업학점 4.0이 내 안에 들어왔지만 충족감은 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오랜 기간 생각해봤다. 나는 분명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달린 결과 목표를 달성했는데 왜 이런 허무한 감정이 드는 것일까. 스스로 고민한 결과는 이렇다. 나에게는 4.0이라는 학점 자체가 목표였다. 즉, 내가 살아가고 싶은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학점 4.0이라는 결과 또한 하나의 과정으로 지나가는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방향은 생각하지 않은채 4.0이라는 학점 자체가 목표, 골인 지점이 되어버리니 힘껏 달려 4.0을 성취했지만 허무함만 남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부했던 과정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과정이 아름답게 보였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최적의 효율을 내기 위해 생활 패턴을 강제로 바꿨다. 점심 시간에 사람이 몰리면 줄을 서야하고 그러면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열람실 자리가 없어서 배회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도서관을 가고, 줄서는 시간을 없애기 위해 점심을 10시에 먹고 저녁을 4시에 먹는 삶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4시에 일어나려면 저녁에 일찍 자야했기에 저녁 약속을 잡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계속하면 익숙해질법도 한데 익숙해지지 않았다. 특히 새벽 4시 기상은 일어날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그 때는 이런 행동들이 4.0이라는 보상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박사과정 시절, 내 목표는 좋은 논문을 써서 노벨상을 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이 모든 고통은 내가 노벨상을 받으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학계를 떠났지만 내가 만약 학계에 계속 남았다면 내 삶의 방향보다는 나를 벗어나 외부에 존재하는 결과물에 인생이 매몰되어 인생 전체를 되돌아봤을 때 허무함만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향과 이유를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하는 외부의 것들로만 채우려고 했으니 설령 그 목표를 달성해도 내 안이 채워질리가 없었을 것 같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나'는 없었던 것이다.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유학갔다가 귀국했을 때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더 이상 학점이나 상장, 자격증 같은 것은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취업도 특정 회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어느 회사든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첫 직장인 크래프톤을 퇴사할 때 주변에서는 "거길 왜 퇴사해? 그냥 다니는게 어때"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로서는 나라는 사람 외부에 존재하는 회사 간판으로 나를 채우지 않았으니 전혀 아쉬울게 없었다. 그저 내 삶의 방향과 다르니까 퇴사할 뿐이다. 애초에 내가 만든 회사도 아니지 않은가.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자격증이나 학위와 같은 외부 결과물 위한 공부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이끌리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걸 왜 해?", "자격증 따려고?", "학위 주는 것도 아닌데?"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외부에 집착하지 않으니 공부도 더 잘되었다. 자격증이 목표라면 최소의 공부로 최대 점수를 내는 쪽으로 공부하게 된다. 시험에 나오는 것 위주로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궁금해서 파고 들고 싶은 부분도 시험에 안나오니 그냥 넘어가게 된다. 왜냐면 공부자체가 시험일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결과물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았다면 내가 순수하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는 주도적인 삶을 살게도되고 집중과 몰입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학교 다녔을 때보다 직장다니면서 취미로 공부하던 시절이 나에게는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금의 삶을 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취미가 인생을 바꾼 것이다.




학창 시절을 스스로 되돌아보았을 때 학점 같은 외부의 것들로 나를 채우려고 노력했던 고통 뿐인 삶이었다면, 학교라는 틀을 벗어나고 나에 집중하니 비로소 내 안이 채워지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라고 대답한다. 내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지금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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