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은 엄마의 언니다. 회사에서 동료로 만난 것이 엄마와 옥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인연이 10여 명 정도로 구성된 사모임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5년쯤 됐으려나?
엄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었던 옥은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 근처에 산다.
올봄에 나의 책이 출간되면서, 옥에게는 사인을 해서 선물을 하였다. 그 책을 받고 바로 읽은 옥은 나에게 팬레터를 보내주었다. 독자님에게 손 편지를 받다니. 너무 기뻐서 편지를 꺼내보니, 편지로 현금을 싸서 봉투에 넣는 꼼수를 썼다.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편지와 함께 용돈을 넣으셨다. 깜찍한 옥.
옥은 나의 책을 읽고서,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며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해왔다.
옥의 편지와 용돈을 받고서, 나는 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옥은 따스한 말을 잔뜩 쏟아내더니 데이트 신청을 하였다.
옥과 나는 10여 년 전에 처음 만났다. 나의 투병 초기였던 것 같은데, 정확한 연도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봄이었고,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외래를 간 참인데 옥이 나와 엄마를 보겠다고 직접 병원까지 와 주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첫 만남을 가졌다. 옥은 처음 보는 나를 정말 크게 팔 벌려 안아주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옥과 엄마가 함께 하는 모임에 내가 두어 번 갔었다. 제기랄. 엄마 모임에 아가처럼 따라가서 밥을 얻어먹고 놀다 온 정연이다.(엄마는 모임 막내이기 때문에, 막내의 딸인 정연은 거의 손녀 취급이었다.)
그러고 나서 옥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남편이 투병을 시작했고,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꼭 붙어 지냈던 다정한 남편과 이별을 했다. 옥은 내게 무심했다고 자책하지만, 나야말로 옥이 남편을 잃었던 그때 찾아가 보지 못했다. 마음 한 자락 전하기도 힘들었다.
실은 옥의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다. 그랬던 우리 사이였는데, 이번에 팬레터와 용돈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번호를 주고받았다.
옥은 내가 강남에 있는 병원에 외래를 가는 날, 자신이 맛있는 것을 사주겠노라 말했다. 그래서 7월 25일에 외래를 간다고 말을 해두었더니 정말로 7월 초에 정확한 진료 날짜를 묻기 위해 옥이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7월 25일 정오에 만나기로 한 우리는 전날에도 약속 확인 전화를 주고받았다.
약속 당일에는 환자가 많아서 외래 진료가 30분이나 지연되었고, 1년에 한 번씩 하는 뇌사자 등록 채혈이 있는 바람에 옥이 병원으로 나를 찾아 들어왔다. 옥도 사실 이 병원에 다니고 있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빠삭하다. 나를 찾느라고 2층 어드매를 돌아다니다 내게 전화를 하며 다리를 건너오는 옥을 나는 대번 발견하고 알아보았다. 옥은 나를 보자마자 또 꼭 안아주었다.
옥은 보호자가 되어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수납창구에도 채혈실에도 따라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일이 끝난 우리는 건너편의 쇼핑몰 식당가로 갔다. 옥은 엄마에게 전화해서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잘 먹는지 이미 물어봐 두었다고 하신다. 그래, 나는 육식녀 정연이다.
옥은 자꾸만 내게 비싼 고기를 사주려고 해서, 내가 일부러 다른 곳으로 손길을 끌었다. 적당히 비싸고 적당히 맛있는 점심을 함께 했다. 사실 나의 기준에, 그 동네는 다 비싸다. 식사를 하기 전에 옥은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부터 주었다. 파란 티셔츠와 팔찌 세 개. 첫 데이트 선물을 잔뜩 받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나는 민망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로 갔다. 시원한 커피를 한잔씩 마시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78세의 옥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옥처럼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지게 마련인데, 옥은 새로이 아쿠아로빅을 시작해서 전보다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있다고 한다. 운동도 하고, 또 친구들과 이곳저곳 구경하는 짧고 긴 여행도 많이 다니는 옥.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옥이 정말 좋았던 것은, 옥은 '강남 할머니'인데도 젠체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옥은 소탈하고 꾸밈이 없었다. 용돈벌이를 하러도 다니고, 아들이 있어도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친구도 많고, 바쁘지만 나는 옥이 외롭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그래도 옥이 너무도 밝고 건강한 어른이어서, 옥의 좋은 점들을 많이 배우고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식사와 티타임까지 가진 우리는 백화점 구경을 가기로 했다. 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누구와도 이렇게 손을 잡고 다니지 않는 내게, 옥과 마주 손잡는 일이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78세의 옥과 30대의 나는 어떻게 보일까. 아주 사이가 좋은 엄마와 늦둥이 딸처럼 보일까. 아니면 젊고 세련된 할머니와 손녀처럼 보일까. 그 어느 쪽이어도 옥과 각별한 사이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스레 행복했다.
옥은 나와 자주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나 또한 옥과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학병원에 오는 때라면 언제든 시간을 내어 만나러 나오겠다고 하는 옥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옥과 손을 흔들며 헤어진 후, 근처인 강남구청역에서 또 좋은 친구 한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다. 전에는 머나먼 강남의 대학병원까지 외래를 가도 집으로 돌아오기 바빴다. 그런데 이제는 '정연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시간을 내겠다."라고 하는 친구가 둘이나 생겼다.
70년생인 친구와 평어를 쓰며 지내고 있는데, 이제는 70대 친구까지 생겼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독특하게도 나의 관계는 나이를 초월해서 자꾸만 확장되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옥과 얼마나 즐거웠는지, 옥이 사주었던 식사와 커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일일 드라마를 볼 시간이어서 정신없을때인데도 옥은 나의 전화에 무척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머잖아 나는 또 대학병원에 갈 테고, 옥에게 연락을 하겠지. "정오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