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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Oct 27. 2024

다음 생에 만나요.



나를 이식시켜서 얼른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이모는 화를 버럭 냈다. 너네 형편에 무슨 이식이냐고. 그냥 투석이나 받다가 가면 그만이지.

이모들 중에서 가장 나를 예뻐했던 둘째 이모였다. 엄마가 두개골을 여는 큰 수술을 했을 때, 병문안을 왔던 이모는 이까짓 투석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스레를 떠는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이모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모의 표정 속에 떨떠름함이 묻어났다는 것을, 이모의 차가운 말을 전해 듣고서야 알았다.

 



투석 2년 차, 갑자기 엄마가 쓰러지면서 정남이와 둘이서 엄마를 간병했다. 투석이 끝나면 새벽에 싸 가지고 나온 짐을 짊어지고 버스를 두 시간 타고 대학병원에 가서 정남이와 교대를 했다. 그리고 엄마를 돌보고, 그 밤을 함께 보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다음 날 투석을 갔다. 정남이가 훨씬 많은 시간의 무게를 짊어졌다. 대신에 나는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서 관공서며 어디며를 뛰어다녔다. 투석이 끝나자마자 시청에 찾아갔던 날에는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를 악 물고 버텼다.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면 어린 정남이와 마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무엇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늘 강한 사람으로,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긴 13년을 버텼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이모는 아빠와의 금전적 문제 때문에 내가 건강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빠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나는 한순간에,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악담을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그저 어른들을 원망했다. 그리고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마음은 와르르 무너졌다. 나와 유전자를 공유한 사람들조차 내가 투석만 받다가 죽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은 모두 내게 그보다 가혹하겠구나. 그럼에도 타고난 순진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사람들을 믿었다. 그리고 배신당하는 일을 반복했다. 누구보다도 아빠를 닮은 탓이다.


2000년대 초반, 아빠에게 물건 대금을 주지 않은 거래업체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망쳤다. 그중 충주에 사는 사장님과는 소송을 해서 이기기까지 했다. 그 판결문을 받고도 그는 아빠에게 1억이 넘는 돈을 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의 사업체며 집으로 찾아갔지만 이미 잠적한 이후였다. 그의 집에는 어린아이 셋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빠는 그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거 밥은 뭇나?" 도리질을 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아빠는 근처 슈퍼로 가서 쌀 20kg 한 포대를 사서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라면 한 박스 산 것을  엄마에게 들고 뒤 따르게 하였다. 삼 남매의 현관 안으로 쌀 포대와 라면 박스를 내려주고,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었다. 부모님 오실 때까지 밥 굶지 말고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당부를 남겨두고 대구로 돌아왔다. 그 오지랖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죄가 없다는 아빠의 생각은 분명히 옳았고, 네 부모가 돈을 떼먹었다며 아이들에게 분풀이와 해코지를 하지 않고 쌀과 라면을 사주고 온 것이 다행스러우면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이모가 내게 막말을 했을 때, 나는 충주의 그 아이들을 생각했다.

나는 불행했다. 그 누구도 나의 현관에 쌀 포대와 라면을 넣어주지 않았다. 세상은 내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불친절한 세상에 맞서 싸웠다. 악착같이 살았다. 나는 병에 걸렸다. 병에 걸리고도, 이모에게 악담을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충주의 그 이들을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우리 아빠처럼 친절한 어른을 만났었다. 그 후로도 계속 그렇게 친절한 어른들을 만나며 상처 없이 어른이 되었기를. 나처럼 불행하게 살지 않기를, 나처럼 희귀 난치병에 걸려 삶이 찢겨 너덜너덜해지지 않기를. 어차피 나는 불행해질 대로 불행해졌다. 나의 불행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아무리 그들의 아버지가 내 인생에 불행의 단초를 제공했을지라도, 나는 그 아이들이 정말로 어디선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무수히 많은 밤 동안 빌었다. 결국 이 또한 아빠를 닮은 탓이다.


아빠가 위독하다. 정남이가 아빠의 모습을 보고 전해준 말에 의하면, 정말 가죽과 뼈만 남아 보기 처참할 정도라 한다. 아마 우리는 이번 생에는 영원히 이별하게 될 것이다.

나의 병을 팔아 병팔이 아이돌로 살아가도, 기특한 정남이를 자랑삼아서 팔아도 절대로 절대로 아빠에 대한 글은 쓰지 않겠노라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정남과  엄마가 이미 의식을 잃은 아빠를 만나러 간 밤에 집에 홀로 남아, 수술하고 꿰맨 상처를 덮은 밴드를 뜯어냈다. 무수히 많이 찢고 꿰맨 살이었지만, 이번처럼 가지런하게 꿰매진 것은 처음 보았다. 가지런하게 꿰매진 상처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쩌면 아빠와의 이별을 통해, 제대로 꿰매지 못한 상처를 꿰매야 할 차례인가 보다 생각한다.


아빠와 내가 다음 생에는 다른 모습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부모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아빠는 한탄했다. 학생시절 배구선수로 활약하다가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부도, 배구도 끝까지 하고 싶었었다는 말을 내게 하며 눈물을 보였었다. 나의 조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었고 형편도 넉넉했지만 잔정이 없었고 자식의 꿈을 격려하고 응원하며 뒷받침해주지는 않았다. 다음 생에는 내가 먼저 태어나 부모가 되어, 아빠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게 해주고 싶다.


아빠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다. 아마 할머니에게 좋은 아들도 아니었을 것이고, 할머니보다 먼저 떠나는 자식이 될 터이니 그보다 큰 불효도 없을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마지막까지 골칫덩이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을 해하는 인생은 살지 않았다. 나의 인생은 단 한 번도 책임져 준 일이 없는 아빠였지만, 자신의 돈을 1억 도 넘게 떼먹은 집 아이들 배곯는 것은 마음 아파했다. 마음만은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편안히 떠났으면 좋겠다. 다음 생으로 가는 당신의 길이 험난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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