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기획자가 끝까지 붙잡아야 할 단 세 가지 능력
"RAG, MCP"
상무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내 머릿속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아 또 내 몫이 되겠구나....' 동시에 '이게 뭘까? 궁금한데?'
낯선 용어 한두 개가 떨어지면 나는 순식간에 여러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된다. 문제를 정의하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고 내가 과장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일. 나는 언제부터인가 의도적으로 좋은 기획자, 기여하는 기획자가 되기 위해 어떤 능력을 개발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획자의 능력 중 하나는 문제 정의 능력이다. 아직까지 AI는 게으른 능력자다. 실력은 무척 뛰어나지만 시켜야만 일을 하는 존재이다. 기획자는 이 게으른 능력자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문제 정의 능력이 꼭 필요하다. 대부분의 문제 정의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야 가능할 때가 많다. 나는 아기가 없을 때 육아 서비스에 대해 관심도 없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문제 정의를 1도 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해결할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아기 키우는 엄마 입장이 되고 보니 여러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기 키우는 엄마도 사람이니 잠깐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해야 한다. 하지만 돌 전의 아기는 24시간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다. 내가 머리를 감을 동안, 샤워를 할 동안만 누군가 돌봐주면 되는데 내가 원할 때 바로바로 아이 돌봄 시터와 연결되진 않는다. 서로 필요로 할 때 매칭이 된다. 매칭이 어쩌다 되면 좋지만 지역상, 시간상 이유로 매칭이 안되면 그때부터 엄마는 힘들어진다. 이렇게 직접 경험을 하고, 엄마 입장이 되면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업무 중에서도 동시에 하는 행동들을 루틴으로 만들어 서비스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어차피 반복적인 루틴이 있다면 사용자가 일일이 행동하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 꼭 음악을 튼다, 사진을 찍고 꼭 밥을 먹는다. 이런 루틴이 있다면 그 루틴을 합쳐서 제안하는 것이 사용자에겐 더 편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고객의 불편한 지점을 해소하기 위해 행동 전후 맥락을 같이 볼 수 있도록 시퀀스 데이터를 분석하였다. 그런데 데이터가 정말 수천, 수만 데이터가 쏟아지는 것이다. 어떻게 시퀀스를 볼 수 있을지도 무척 막막했다. 나의 할 일은 여기까지, 문제를 발견하고 더 편리한 지점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지점까지다. 이다음부터는 AI를 시키면 된다. 이 시퀀스 데이터의 패턴을 확인하고 어떤 유형인지를 분석하는 것은 이제 게으른 실천가가 내 명령에 맞춰 진행하게 된다. 아주 유능하고 효율적이면서 정확한 녀석이 실행은 얼마든지 잘해놓는다. 단, 내가 문제를 말해줄 때만 말이다. AI가 실행을 대신해 준다고 해서 기획자의 고민이 끝나는 건 아니다. 정작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하는 일은 결국 내가 가진 관심과 경험의 폭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깊숙이 경험하고 사유할 수 있다면 뛰어난 기획자가 될 것이다. 그만큼 관심이 늘어나고 문제도 많이 보이니까.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한정적이고 경험은 선택의 과정이다. 나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을 한 순간 딩크족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아직 30대라서 80대 노년층의 경험을 충분히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결국 누군가의 경험을 대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경험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고 누리기 위해 일부러 책을 읽고 나만의 질문을 다시 만들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 질문은 대부분 답이 없다. 최근에는 '돈이 보이는 빅데이터'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퍼지 로직'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 단어 자체도 낯설어 찾아보았지만 결국 'AI시대, 데이터를 다루는 기획자는 어떤 경쟁력을 갖춰야 할까?'라는 질문까지 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현상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계속 이어나가고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제를 정의하고 질문을 늘 하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하려고 한다. 물론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발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문제를 알아챈 순간부터는 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어찌 보면 정치감각이 필요한 셈이다. 지금 설득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영역이 참 쉽지 않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회의가 끝나면 온몸에 기운이 빠진다.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와 오래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르고 생각도 다 다르다는 점도 설득하는데 쉽지 않다. 최대한 나는 관점을 바꾸려는 연습을 한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먼저 떠올려본다. 물론 쉽지 않다. 무작정 듣는 건 곧잘 지루해지고 금세 딴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꾸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일부러 듣기를 관찰처럼 연습한다. 말의 내용보다는 말투와 표정과 주저하는 순간을 붙잡는다. 그냥 흘려버리면 놓치는 것들을 붙잡아두려고 했다. 설득은 결국 말보다 관찰에서 시작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메타인지는 내게 있어 훨씬 더 어렵다. 남의 부족한 점은 잘 보이는데 내 부족한 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 한 업체와 미팅을 했다. 우리는 자료를 가득 준비해 갔지만 상대는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뭘 하고 싶은 건지. 내 입장에서는 일을 정리하려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제3자에게는 압박처럼 들렸다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애초에 그 준비 자체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는 걸. 나는 일을 확실히 한다고 믿었는데 상대방 눈에는 전혀 다르게 비쳤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태도를 더 경계하게 됐다.
메타인지가 없다면 기획자의 성장 과정은 겉돌기 쉽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역량을 빠르게 습득해야 할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 역량 개발은 누가 대신 해주기 쉽지 않다. 내 경험상 리더가 성장을 지원한다는 건 그냥 선언적인 메시지일 때가 많다. 일단 리더들은 너무 바빠서 본인 살기도 정신없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이 정확히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뭘 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메타인지가 부족하면 희한한 방향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학습은 이것인데, 다른 부분에 관심을 기울이는 식이다. 기획자 초년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연차가 쌓이면 메타인지 없이 참 버티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된다. 언제든지 쉽게 대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AI가 도래하고 나서 누구든 대체할 수 있지만 계속 본인을 빠르게 맞추고, 조절하는 사람은 대체가 그나마 느리다는 생각을 한다.
안타깝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나조차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령을 내리고, 상황 판단을 하는 것만 제외하곤 AI가 실행력 측면에서는 압도적으로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20년 넘게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뤄 그래픽 툴은 정말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AI가 뽑아내는 이미지 퀄리티를 보면 나의 20년 세월이 무색해진다. 물론 애초 AI와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미 많은 회사들이 인력 감축을 하고 있으니 결과물, 효율만으로는 AI가 확실히 더 낫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시점이야말로 나를 돌아보고 빠르게 내 위치를 객관화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무엇을 강점으로 이 조직에 기여할 것인지, 어떤 능력을 빠르게 키울 것인지. 그걸 융합해서 진짜 기여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요즘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더 자주 나를 돌아본다. 지금 이 조직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능력을 더 빨리 키워야 할까. 이 둘을 섞어서 내가 진짜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문제를 정의하고 사람을 설득하고 스스로를 검증하는 일. 어쩌면 기획자가 끝까지 붙잡고 고수해야 하는 능력은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싶다. 기획자는 문제와 사람, 자기 자신과 끝까지 씨름하는 존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