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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Sep 17. 2023

눈부신 실력


어느새 연계형 교실에 가면 삼십오 분 영어 공부, 쉬는 시간, 다음 수학 공로 시간표가 짜였다. 한번 할 때 서너 명의 아이들을 맡는다. 진도도 나가야 하고 모르는 문제도 설명해줘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공부를 잘 가르칠 거라는 것도 고정관념일 뿐이다. 정규 교육은 열다섯 살에 그만뒀고 학원도 다닌  적 없으니 내 수학 실력은 근의 공식 이전에 멈춰있다. 아이들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면 대강 문제집 속 개념을 얼버무리다 답지를 펼쳐보기 일쑤였다. 주변 동기들 과외나 학원 알바를 하는 걸 보면 내가 유달리 아는 게 없는 편이기도 하다. 내 설명을 듣는 아이들 눈빛에도 신뢰가 없는게, 내가 어설프게 선생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강 선생님이 고른 초등 영문법 책을 받아들고 일단 세 명을 가르치기로 했다. 왼쪽에 써 있는 문법 개념을 알려주고 오른쪽에 있는 문제를 푼다. be동사와 단수, 복수 등 가장 기초 영문법이다. 덕분에 나도 헷갈리는 개념을 다시 배웠다.

사학년인 주영이는 곧잘 한다. 따로 영어 학습지를 오래 했는지 단어도 많이 알고, 발음도 좋다. 분량을 정해주면 순식간에 푼다. 빨리 푸느라 작은 실수들이 오답일 뿐이다. 영리하고 예리해서 수업 시간에 내가 주영이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정신을 잘 차리고 있어야 한다. 

삼학년 규민이는 의젓하고 똘똘하다. 글씨를 무척 바르게 쓰고 공부 태도도 좋다. 언니들이 공부 시간 내내 소형견처럼 발랄하게 떠들고 있을 때도 묵묵히 자기 공부를 하는 아이다. 영문법을 처음 배울텐데도 금방 주영이를 따라잡고 혼자 쑥쑥 진도를 나갔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늘 열심히 한다. 그건 불안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거라고, 강 선생님과 나는 추측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 나는 이번에 희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학년 희수는 통통 튀고 애교도 많다. 선생님을 안는 걸 좋아하고 심심하면 무릎에 앉으려 해서 말려야 한다. 주영이와 단짝처럼 친하게 지낸다. 주영이는 성격이 강하고 희수는 순한 편이라, 강 선생님은 한때 주영이가 희수를 따돌리려 했다며 늘 날카로운 눈으로 둘을 보고 있다. 희수는 영어 실력은 주영이와 규민이보다 많이 뒤쳐져 있었다. 영어뿐 아니라 국어,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않다’와 ‘앉다’ 등 받침 두 개 

수학 학원을 다니기는 하지만 진도를 급하게 빼는 학원에서 오히려 격차가 더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영문법 이전에 알파벳을 먼저 떼는 게 필요했다(라는 말을 강 선생님에게 들었지만, 그 말은 영문법도 가르치고 따로 알파벳 숙제도 내 주라는 이야기였다). 일단 부모님들이 강 선생님의 부탁으로 교재를 사 왔으니 성과를 보이기도 해야 하는 일. 세 명 다 영문법 진도는 똑같이 나갔다. 희수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가르치는 건 쉽지 않았다. 특정 알파벳의 조합이 단어를 의미한다는 걸 알려줘야 했고, 문장 구조의 규칙도 설명해야 했다(결국 국어 실력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처음 문제를 풀 때 희수는 혼자서는 풀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열 문제 중 서너 문제를 맞추는 정도까지 올라갔다. 개념을 알려주면 다음 수업때 다 잊어버려서 몇 번이고 앞으로 돌아가 같은 걸 다시 공부했다. 희수가 눈을 반짝거리며 ‘저 공부 잘하죠?, 선생님!’ 하고 물었을 때면 대답을 얼버무리다 날 민원 넣겠다는 협박을 한 희수는 강 선생님한테 호되게 혼났다. 희수가 공부 머리는 도통 없구나, 라고 반쯤 포기한 채 어영부영 문제집을 풀어나갔다. 

연휴가 끼어 한 주 정도 쉬고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규민이와 주영이는 늘 하던대로 두 단원씩 진도를 나갔다. 희수도 하던대로 지난 단원 문제를 노트에 따로 다시 풀었다. 확인해보니 다 맞았다. 숙제도 같은 걸로 내줬으니 답을 외웠거나, 답지를 보았나보군. 같은 문법이지만 풀지 않은 뒷장의 문제를 내줬다. 희수 혼자 풀더니 이번에도 다 맞았다. 무슨 일이지? 아예 단어랑 문장을 살짝 바꿔서 노트에 다시 새 문제를 풀게 했다. 이번에도 전부 맞았다. 지금까지 열 번 넘게 설명해 줄 동안 늘 까먹고 헷갈려했는데, 갑자기 한 개도 틀리지 않는다고? 

“희수야, 솔직하게 말해 봐. 선생님 없는 동안 특강이라도 듣고 왔어?”

“아뇨, 사촌들이랑 놀았는데요!”

“선생님이 불러주는 단어 빈 칸 채워봐.”

알파벳 공부 겸 실력 확인 겸 간단한 단어를 불러주니 조금 고민하긴 했지만 금방 다 썼다. 틀리지도 않고. 희수와 공부한지 반 년이 다 되어가도록 이런 적은 처음이야! 난 어리둥절해서 희수 정수리만 쳐다봤다. 왜..잘하지? 영어를 외우는 기혈이라도 눌린 것처럼 난데없이 번쩍 문제를 잘 풀게 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몇 번의 검증을 끝낸 후에 나는 희수가 답을 보고 푼 것도, 외운 것도 아니고 정말 문법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며칠 사이 레벨2에서 레벨 15정도로 훌쩍 뛰어넘어 온 것 같았달까. 무엇이 이런 성장을 만들었지? 난 하던대로 했고, 희수도 하던대로 했고 틀리면 다시 풀고 모르면 다시 앞으로 돌아간 것 밖에 없는데?

“희수야,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잘하게 됐어?”

희수는 내 말에 자기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마치 내가 여러 번 반복 설명해줄 때의 멍한 얼굴로)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말했다.

“그냥 하는 건데요?”

그 뒤로 희수 실력은 내려가지 않았다. 쭉쭉 올라갔다. 더 이상 여러번 설명할 필요도 없이 한 번 알려주면 곧잘 풀었다. 알파벳도 다 외웠고. 잘 맞물려 돌아가는 세 명의 아이들을 보며 나는 희수가 영어를 잘 하게 된 건 내 덕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개념을 설명해주긴 했으나, 무언가 정말 알게 된 건 순전히 희수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희수가 지금보다 잘 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리한 아이가 되지는 않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열한 살 희수는 내 비관에 아랑곳 않고 멋지게 성장했구나! 배우고 익히고. 아이들의 그 과정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면 무척 좋으련만, 나는 그렇게 대단한 선생님이 아니다. 한 명의 특성을 다 안다고 생각해도, 아이들은 언제나 그 예상을 벗어나면서 자란다. 예측하지도, 기대하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말 것.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태도 중 하나다. 흐르는 시간과 성장하는 아이들이 만나면 뭐든지 일어날 수 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희수가 성적표를 팔랑팔랑 보여주었다. 영어는 100점, 나머지는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나는 희수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렸다! 100점은 주영이도 규민이도 받았지만 희수의 100점은 한층 특별했다. 그건 희수가 강 선생님도 내 예상도 뚫고 혼자서 눈부신 성장을 했다는 증거였으니까.  

“희수 너는 정말 대단해. 천재야! 너무 똑똑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

“당연하죠, 선생님. 전 원래 천재였어요!”

희수는 언제나처럼 애교가 넘쳤고 이내 주영이랑 손을 잡고 엉덩이 춤을 추었다. 

이번 연계형 교실은 지원자 초과로 사학년 이상 학년은 더 받을 수 없으니 내년 돌봄교실에 주영이와 희수는 없을 것이다. 돌봄 교실을 가지 않으면 혼자 있기도 하고 대부분 학원을 다닌다고 한다. 나중에 희수는 더 넘기 힘든 공부의 벽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 앞날이 어떻건, 중요한 건 희수의 눈부신 실력은 그 애 안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 내가 거기 일조했다는 작은 만족감으로 올 한 해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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