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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른손 Apr 11. 2019

<회고록#3 - 첫사랑 E(3)>

꿀 물주, 지독하고 긴 숙취.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다.

소주 4/5, 맥주 1/5. 꿀 물주를 만드는 비율이다. 항상 꿀 물주를 먹은 다음날이면 숙취로 내리 3일을 고생한다. 

지독한 숙취. 첫사랑과의 이별과 같았다. 


3월의 봄날 전화가 울려온다. E, 그녀다. 


"오빠, 오늘 할 말 있으니까 신세계백화점으로 나와."

"응~ 알았어. 이따 봐. 뿅"


저기 저만치에서 그녀가 보인다. 아주 이쁜 옷을 입고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표정이 아까부터 심상치가 않다. 쓸쓸해 보였고, 세상 끝난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를 위해 애써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평소와 같이 그녀의 기분을 북돋아주려 애썼고 노력했다. 같이 앉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축 처진 그녀의 어깨를 어떻게든 다시 명량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소리를 삼키며 서럽게 울었다. 집으로 각자 헤어지는 길.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내가 뭐 또 잘못한 거 있어? 고칠게..."

"아니, 우리 서로 너무 안 맞는 거 같아. 요즘 오빠 만나는 게 너무 괴로워."

"..."

"그리고 직접 얼굴을 보고 있지 않을 때, 연락하는 중에는 보고 싶지 않았어."

"..."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한 거야?"

"응."

"후회 안 해?"

"할 것 같아. 그런데 이게 서로한테 좋을 것 같아."

"알았어. 정말 사랑했고. 고마웠어.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잘 지내..."


무슨 용기였는지 돌아섰다. 황급히 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탔다. 눈물 때문에 앞이 흐려져서 저게 문인지 벽인지 분간이 안됐다. 그렇게 이별을 다짐했다. 그러나...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의 부재. 나와 생활을 공유하던, 의지하며 유대를 쌓아가던 연인의 부재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현실감각이 사라졌다. 도무지 꿈이 아니고서야 일어나지 않을 일 같았다. 판단력을 상실하고 밥을 먹지 못했다. 숨이 제대로 쉬지 않았다. 온몸이 저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걷지 못했다. 너무 울어 탈수 증세가 왔다.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에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중 한 친구가 붙잡는 것을 추천했다. 어떻게든 이 고통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굳은 다짐은 하루가 지나고 쉽게 깨졌다.


잠을 청하지 못한 채 밤을 새웠다. 새벽부터 일어나 소주 2병과 맥주 한 캔을 사서 공원에서 한 번에 들이켰다. 이상하게 전혀 취하지가 않았다. 속도 멀쩡하고 말이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갈등하고 고민했다. 결국 그녀를 다시 찾아가 붙잡아보기로 했다. 나의 마음을 담은 편지와 함께 그녀에게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 메시지 했다. 제발 나와달라고 기도했다.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나왔다. 남자답고 멋지고, 냉철하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다르게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달라고, 내가 더 잘해본다고 애처롭게 붙잡고 길에 주저앉고 빌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나의 마지막 소원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오늘이 끝인 것처럼 데이트하고 싶다 했다. 그녀가 승낙했다. 우리는 초봄의 따듯한 날씨 속에서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데이트했다. 서로에게 서운했던 점, 부족했던 점, 미안함, 아쉬움 등 모든 감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또한 서로 웃기도 울기도 했다. 저녁이 다가왔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이제 갈 시간이네. 이만 가볼게."

"그래. 잘 가."

"잘 지내. 안녕."


그녀가 나를 꼭 껴안았다.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촉감, 숨결, 향기, 지금 우리의 이 애틋한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그녀도 서로가 너무나도 아픈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잡은 손을 계속 쥐고 있을 수 없었다. 서로를 망가뜨리는 파괴적인 사랑. 내가 그녀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감정적인 폭력이 될 수 있었다. 결국 그 사랑의 본모습에 굴복하고, 잡은 손을 놓았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눈물 젖은 이별로 아픈 연애의 막을 내렸다. 이후 아예 연락을 끊지 못했다. 그녀도 나도, 너무나도 아직은 아쉬웠기에 점점 질척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모든 연락수단을 차단했고, 나 역시 차단해주길 부탁했다. 그렇게 나는 길고 어두운 터널의 초행길에 들어섰다. 


상처를 치유하고 아픔에 익숙해지는 데 장장 1년이 넘는 시간을 소요했다. 그동안 계획했던 '나의 미래'와 '건설적인' 생각들은 이별 앞에 힘없이 와르르 무너졌다. 학습능력은 전보다 현저히 떨어졌고, 대인 기피증이 생겨 단체로 다니는 것이 두려워졌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완전히 사라졌고, 누군가를 다시 만나 사랑한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에게 당시 평생의 사랑은 E였다. 반대로 상대방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이렇게 돼버린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못나보였다. 이별은 일어나지 않은 상상 속의 일인 것처럼 현실을 부정했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야'라며 스스로 희망고문시켰다. 감정의 '불구'상태.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나 자신을 점점 몰아넣었다. 


헤어지고 약 한 달 반을 이불을 덮어쓰고 꺼이꺼이 울었다. 혼자 마시는 술이 늘어났고, 담배를 하루에 3갑이나 피워댔다. 어디든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처음에는 친구, 술, 담배, 그리고는 최후를 생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가슴 가운데가 빈 공간처럼 느껴지고, 새벽과 밤마다 욱신욱신거렸다. 일을 하다가 혼자 멍 때리는 시간이 늘었고 그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억지로 잘 지내려 겉으로 애썼지만 6개월이 지나도, 겨울이 와도 우울했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의 제대로 된 이별. 처음 겪는 아픔에 이겨낼 의지도 방법도 몰랐던 나는 기나긴 숙취에 시달렸다. 1년의 시간 후, 나는 점점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았고 변화를 갈망했다. 다시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면, 그나마 그녀 없이도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다.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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