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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Jul 13. 2021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당신이 잊고 있던 소원은

환자복을 입은 노인이 침대 위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나는 한평생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지.”

노인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아내와 심하게 다툰 그날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거란 걸 몰랐어. 나는 입에서 모진 말을 쏟아내고는 그녀의 얼굴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와 버렸어.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후였지. 나를 찾느라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사고가 났다더군.”

노인은 괴로운 듯이 몸을 떨었다. 그는 몸을 누인 채 가늘게 숨을 내뱉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죽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천사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어. 오히려 윽박지를 때가 많았고, 그녀를 슬프게 했지. 그녀가 먼저 갈 거라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끝날 걸 알았으면 나는 그런 식으로 문을 박차고 나오지 않았을 거야. 아니, 애초에 내가 좀 더 상냥하게 굴었더라면… 아무리 화가 많이 났어도 마지막에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어야 했어.”

노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꺼풀에 맺혀있었다.

“그녀는… 내가 많이 사랑했다는 걸 모른 채로 슬퍼하며 떠났을 걸세. 오히려 내가 그대를 미워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추한 모습만 보여줬어. 그 사실이 가장 안타까워… 내 인생은 후회로만 가득하네.”

“후회가 남았다고 해서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의 주름진 손을 바라보았다.

“다만…”

노인은 숨이 멎어 드는 것을 느꼈다.

“다음 생에는 후회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천사는 노인의 눈꺼풀이 닫히는 걸 지켜보며 말했다.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노인이 그걸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편안해진 듯, 달이 차는 모양으로 그의 눈은 서서히 감겼다. 닫힌 눈틈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자국을 남기며 투명하게 빛났다.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잦아들었고, 차가운 공기만 그 공간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천사는 죽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었다. 살아온 날들을 떠올리며, 아쉬웠던 점을 다음 생에서는 이룰 수 있도록 해주는 일. 그것이 천사가 모든 이들에게 베푸는 은총이었다. 그렇게 천사는 많은 이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다. 전생에서 갖지 못했던 것의 아쉬움을 다음 생에서는 이룰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사람들의 삶이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천사의 소망이었다.

 

노인은 다시 태어나 화사한 햇살이 잘 어울리는 소녀로 자랐다. 그녀는 마을에서 밝고 상냥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외로운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했고, 그녀 또한 모두를 좋아했다. 그녀는 바쁘게 지내면서도 천사가 자신에게 베푼 특별한 선물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점에 가슴 깊이 감사했고, 벅찬 마음으로 다가올 사랑을 기다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소녀는 정원의 꽃에 물을 주고, 그녀가 키우는 나무의 이름을 하나하나씩 다정히 불러주었다. 나무들은 그녀가 반가운지 손을 넘실넘실 흔들어댔다. 그녀는 나무에게 인사한 후 방으로 돌아와 햇빛이 비친 커튼 너머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죽기 전에 빌었던 소원은 뭐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소녀는 놀라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보다도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천사가 베푼 은총에 대해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소원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

소녀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누구나 다 받는 선물인 걸.”

“그래?”

소녀는 어안이 벙벙해져 어떻게 더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모른 채 서있었다.

 

“내가 받은 선물은 아름다운 사랑이야. 너는?”

정신을 가다듬은 소녀가 질문했다.

“고작 그런 걸 빌었던 거야?”

“넌, 너는 뭘 빌었는데?”

“나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목소리가 멈추었으나, 이내 말을 이어갔다.

“내 걸 들으면 넌 기분이 초라해질 거야. 그러니까 굳이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악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소녀를 뒤로한 채 사라졌다. 소녀는 모두가 특별한 선물을 받아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으나,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것을 빌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 후로 소녀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각자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묻고 다녔다. 사람들은 소녀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선물을 받은 사실에 놀라워했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길 빌었다고 고백했다. 그걸 들은 소녀는 자신도 부자가 되길 빌 걸 후회했다. 사랑을 얻는 것보다도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은 뛰어난 재주로 성공하는 것을 얘기했다. 그 말을 들으니 소녀도 어떤 분야에서 특출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자신은 보잘것없고 아무 일에도 재능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을 소망했다. 소녀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이 너무 평범하고 볼품없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소원을 비교했다. 자신의 것이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가진 이가 많았다. 그런 하찮은 소원을 빌지 말 걸 하며 후회하는 사람도, 더러는 천사를 원망하는 이도 생겨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서 절망의 목소리가 커지자 천사는 상심에 빠졌다. 천사는 결코 사람들을 화나게 하기 위해 소원을 이뤄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축복했던 것이 도리어 사람들을 슬프게 만든 것 같았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악마가 다가가 천사를 위로했다.

“사람들이 너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속상하겠군.”

“그렇진 않아. 그저 사람들에게 미안할 뿐이야.”

천사는 자기로 인해 사람들이 불행해진 것이 슬펐다. 그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자신의 선물이 처음부터 필요 없었던 게 아닐까, 천사는 생각했다.

악마는 웅크린 천사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차라리 잊어버리게 하는 게 어때?”

사람들이 자신이 빌었던 소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서로 비교할 일도 없을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소원 때문에 더 이상 화나거나 슬플 일도 없을 거라고, 악마는 말했다.

“그래, 그 편이 나을 것 같아.”

천사는 슬픈 눈으로 등을 기댄 채 바닥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악마는 자신에게 의지하는 천사가 만족스러웠다. 결국 천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도록, 과거의 목소리를 모두 감추어 버렸다.

 

마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더 이상 서로의 소원을 묻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비교하지도, 천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선물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받았는지조차 모르기에 고마워할 수도 없었다. 그저 당장에 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치우기에 바빴다.

 

세월이 흘러 소녀는 어엿한 여인이 되었다. 여인은 남모르게 사랑하는 이가 생겼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멋지고 품위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는 것은 영광이라고, 여인은 생각했다. 담장 너머로 몰래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여인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인의 눈은 왠지 불안하고 슬픈 기색이 가득했다.

고요한 밤이 되면 그녀는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 그녀를 야위게 했고, 그녀의 푸른 정원은 나날이 시들어갔다.

 


여인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달빛이 희디흰 어깨 위로 내려앉은 밤에, 반짝이는 밤하늘의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꼭 감은 두 눈과 맑은 목소리,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는 소원을 빌었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해 주세요.”

자신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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