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과 위험, 모험의 감각
수요일, 제주 여행 3일째 아침이다. 벌써 이 섬에 온지 이틀이 지났다.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했지만 날씨는 기분을 따라오지 못했다.
원래 수요일은 우도를 위한 날이었다. 성산에서만 3박 4일을 지낸 건 숙소를 바꾸지 않고 편하게 우도를 다녀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수요일 날씨가 하루 종일 비였다. 분명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미리 살펴봤어야 했는데, 어째선지 날씨에 대한 생각이 한 번도 머리를 스쳐가지 않았다.
그래서 당일 아침이 돼서야 전기자전거 대여점의 전화를 받고 우도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비 때문에 근방의 어떤 대여점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우도행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해보였다.
그럼 뭘 하지? 성산의 숙소로 돌아와야 하니 너무 멀리 가고싶지는 않았다. 근처에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섭지코지였다. 왜 이름이 섭지코지인지, 뭘 보러 가는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들어는 봤지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오후 1시에 숙소 근처의 차(茶) 원데이클래스를 예약하고 그 전까지 할 것도 없으니 일단 섭지코지로 향해보기로 한다. 빗속을 몰며 날씨가 더 궂어지질 않기를 바랬다.
주차장으로 가는 해안도로에서는 파래향이 났다. 비릿한 바다향이 렌터카 에어컨을 뚫고 들어선다. 바다. 이럴 때 바다 가까이에 있다는 걸 느낀다. 그 뿐이지만—간만에 선명한 육체적인 감각을 느낀 것이 반갑다.
거의 매 순간을 머릿속과 관념의 세상에서 지내다보니 뜻하지 않은 감각, 소리나 냄새, 맛과 촉각 따위를 느낄 때면 깜짝 놀라며 현실로 내려오게 된다. 그런 순간들이 고맙고 즐겁다.
어쩌면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현실의 감각적 자극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리고 짭짤한 바다 냄새, 진파랑에서 검정으로 변하는 움직이는 색채. 넓게 펼쳐진 면적이 주는 시각적 자극. 반갑기에, 탐욕스럽게 받아들인다.
비 때문인지 섭지코지 주차장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쓸쓸할 정도로 한적했다. 블로그에서 본 아름다운 해변은 어딜 가고 회색빛의 하늘과 강풍만이 웅웅대고 있었다. ‘이왕 온 거 일단 걸어보자.’ 어제 편의점에서 4,000원을 주고 산 노란 우비를 덧입고 언덕을 오른다.
언덕 위로 생각보다 길게 산책로가 이어져 있었다. 길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다 보면 저 멀리 톡 튀어나온 곶과 등대, 그리고 동떨어진 바위가 보인다. 붉은오름과 섭지코지, 그리고 선돌이다.
풍경 앞의 팻말이 섭지코지의 비밀을 풀어준다. 제주도 말로 ‘바다로 뻗어나온 곶’이라는 뜻이란다. 선돌은 ‘우뚝 서 있는 돌’이다. 모습 그대로의 이름이 붙여진 것 뿐이었다. 김이 피시시 샌다.
섭지코지라 하면 어쩐지 귀엽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는데 제주도 방언으로 된 이름 덕분이었다. 만약 ’'바다로 뻗어나온 곶과 우뚝 서있는 돌’이 지명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바람 속 섭지코지는 나름대로 운치있는 풍경이었지만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바람이 강했다. 우산이 소용이 없을 지경이었다. 앞머리가 뒤엉키고 몸이 흔들렸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어지는 길 앞에 가파른 계단과 하얀 등대가 보였다. 본능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위험의 신호는 모험의 신호다. 저길 올라가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다.
여행은 모험의 감각이다. 평소에 하지 않는 일, 어쩌면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일을—적당히 안전한 범위내에서 시도하는 것, 그런 작디작은 ‘모험의 감각’이 내 여행길에는 항상 포함되어 있다. 물론 진짜로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아프리카 오지 탐험 따위를 간 적은 없지만, 그래도 모르는 길을 냉큼 들어가고 싶은 충동만큼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날씨 좋은 날엔 관광객들로 북적였을 하얀 등대는 거친 풍랑을 견디는 험상궂은 검문소처럼 보였다. 바람이 너무 세서 자세를 숙이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바닥만 보고 기어가듯 올랐다.
무서울 정도의 높이는 아니었다. 가슴의 쿵쿵거림은 비바람과 미끌거림 탓일 것이다. 귓를 때리는 바람이 공포감을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금방 등대에 도착했다. 역시나 그리 높지 않았다.
무의식이 위험으로 인식한 곳에 용기내어 올랐다는 사실이 기뻤다. 때때로 찾아오는 원초적인 성취감으로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꼭대기까지 왔지만, 막상 등대 코앞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높은 곳에 가면 호랑이를 만난 나무꾼, 전조등 앞의 사슴처럼 머리가 하얘지고 손에서 땀이 난다. 별일 없을 걸 머리로 알면서도 발밑이 사라질 것 같은 공포감이 몸을 지배한다. 이 프로세스는 분명 내 유전자에 날때부터 프로그래밍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학습된 것이 아니기에, 떨쳐낼 방법도 딱히 없다. (겨우 등대 안이 궁금하다고 노출-반응방지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다.)
용기를 내어 딱 두 발짝만 더 내딛어본다. 이 정도면 됐다. 오늘의 모험 피러미터는 충족시켰다. 이제 내려가자. 얼른.
내려오는 길에도 몸을 잔뜩 숙여야 했다. 우산은 쓸모가 없어 접어버렸다. 바다를 보기가 무서워 바닥만 보고 내려갔다. ‘그래도 노란 우비를 입고 있으니 조난당하더라도 누가 쉽게 구해주러 올 수 있을거야’, 같은 실없는 생각을 했다.
주차장에서부터 약 1km정도 걸었으니 돌아가는 길도 10분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추위와 바람이 몸을 지치게 했다. 아침 10시였는데 저녁 6시는 된 것 같은 피로감이었다. 섭지코지 앞 해녀의 집에서 뜨끈뜨끈한 겡이죽을 먹을 생각으로 버티며 길을 되돌아갔다. 비오는 날의 제주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비바람 관광을 마치고 마침내 만난 겡이죽은, 열 밤을 자고 찾아낸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맛있었다. 따듯하고 고소한 새우 향이 피로함을 감싸안고 녹여주었다.
겡이죽이라는 개념 자체도 마음에 들었다. 제주도 해녀가 잡은 국내산 참게로 만든 죽. 딱 이런 걸 먹고 싶었다. 육지사람 다운 생각이지.
엄청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제 남은 하루의 일정을 생각해야 했다. 제주도의 삼다(多)중 두 가지, 바람과 돌을 실컷 보았으니 이제 위험 없는 곳에서 차분히 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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