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꿈
차(茶)는 풀 초, 사람 인, 나무 목이 합쳐져 만들어진 한자다. 풀과 나무 사이에 있는 사람, 즉 자연에서 자란 찻잎을 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넓은 차밭에서 자라는 차나무의 잎을 볶거나 가공해 물에 우려 마시는 것이 ‘차’다. 가공 방식이나 수확 시기에 따라 녹차, 홍차, 청차, 다양한 이름으로 분류되고, 또 그 분류 안에서 수십 가지의 이름으로 세분화된다.
이 정성 어린 공정에는 더 좋은 음료를 마시고자 했던 오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차’라는 개념 자체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제주도는 한국의 대표적인 차 산지 중 하나다. 그만큼 다원도 많고 그 밭에서 자란 유기농 잎차를 바로 마셔볼 수 있다. 다도 과정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도 다양하게 운영된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차밭을 들리는 것과 더불어 차와 관련된 클래스도 한 번쯤은 꼭 경험해보고 싶었다.
문제는 이동 동선이었다. 너무 긴 운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에 40분 이상 운전하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20~30분 정도가 적당했다. 성산 지역에서 이 조건을 만족하는 티 클래스는 단 한 곳뿐이었다.
원래는 하루 이틀 뒤 제주시 내륙 쪽 조천읍 카페에서 진행되는 티클래스를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래 우도 일정이었던 오늘, 거센 비바람 때문에 실내 콘텐츠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비어버린 일정을 차 원데이클래스가 채우게 되었다.
섭지코지를 걷고 겡이죽을 먹은 후 차를 몰아 클래스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인센스 향이 풍긴다. 요가와 명상, 차를 콘셉트로 한 독특한 숙소였다. 잔잔한 물소리가 흐르고 고요한 복도 사이로 햇살이 살짝 비친다. 제주도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스타일에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졌다.
지하 다방에서 열리는 클래스의 이름은 ‘마인드풀 티 클래스’. 오로지 차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방에서 차에 대해 배우고 온전히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다기를 사용하는 법,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법을 짧게 체험할 수 있었다.
예약할 때 미리 녹차, 발효흑차 등 체험할 수 있는 차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흑차를 골랐다. 녹차는 앞으로 마실 일이 많으니 색다른 종류를 맛보고 싶었다.
차방 앞에는 작은 편집숍이 있어 인센스 스틱, 다기, 찻잎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유니크한 장신구나 소품도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곧 시작 시간이 되어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갈색 톤으로 꾸며진 방 한가운데에는 원목 탁상과 다기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한쪽 벽은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물이 흐르는 인공 연못과 작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깨끗하고 맑은, 그런 인상의 공간이었다.
곧 클래스를 진행해주실 분이 들어왔다. 먼저 굳어 있는 몸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간단한 이완 가이드를 해주었고, 차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과 마시는 법을 알려주셨다.
차의 맛과 향, 나의 취향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것, 내 몸이 경험하는 것을 적절한 말로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게 차담인가 싶었다. 평소 차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도 몇 가지 여쭤볼 수 있었다.
짧은 가이드가 끝나고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 이 공간을 혼자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다기 옆에 단정히 놓여 있던 싱잉볼의 사용법까지 설명해주신 뒤,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이제 이 작은 방에는 나 혼자였다.
어쩐지 디지털 기기를 켜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눈을 감고 새소리와 음악을 들으며, 그저 이곳에 존재하는 데 집중했다. 다른 무언가를 할 필요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소리를 듣고, 내가 여기 있음을 느끼고, 그 자극이 더 또렷하길 바랄 때 싱잉볼을 톡 두드릴 뿐이다.
내킬 떄 눈을 떠서 창 밖의 물과 풀을 바라보고 따듯한 차로 입을 적신다. 손이 심심해지면 다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한번 더 우린다. 그리고 음미한다. 그걸 반복한다.
조용한 시간이었다. 좋다. 이런 짓을 매일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겠어. 뭐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이런 공간에 머물 수 있다면 웬만한 기분 저하는 좋아질 거다. 적어도 나아지기라도 하겠지.
그리고 문득, 이런 공간을 기획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이상향을 제주도 동쪽 성산리에 자리를 잡고 현실로 구현한 사람. 마음에만 있는 이미지를 목재와 콘크리트로 세우고, 침대를 들이고, 호텔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더해 하나의 공간으로 완성하는 과정은, 분명 가슴 찌릿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 내가 그리는 이상향을 현실에 구현하게 될까. 아직은 그 모습조차 뚜렷하지 않다. 경험과 시도가 쌓이며 노이즈가 사라지고 점차 선명해질 것이다. 먼저 머릿속에서 분명해지고 그 후에는 공간과 질량을 가진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조용히 차를 음미할 수 있는 작은 방을 마련해두어도 좋겠다. 언제든 혼잡한 세상에서 도망쳐, 잠시라도 그저 존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