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9km를 걷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걷기의 저주, 우도와 종달리

by 김유연

걷기가 취미다. 느긋하게 걸으며 달라지는 풍경을 구경하는 게 좋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상념들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다.


도시에서는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1만보 이상 걷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 관광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자연히 걸음 수가 늘게 된다. 특히 제주도는 오름, 일출봉, 올레길처럼 걸어서 둘러보기 좋은 장소가 많아 걷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제주도 여행에서는 원없이, 잔뜩 걸을 작정이었다.


의도는 좋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걷는걸 좋아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여행 4일 차, 드디어 우도를 가게 된 날이었다. 삐걱대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 날의 걸음 목록 중 첫 번째는 성산일출봉 무료 코스였다. 성산일출봉은 5천 원을 내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유료 코스와 해녀의 집 쪽을 둘러볼 수 있는 무료 코스, 두 가지 루트가 있다. 정상은 이미 다녀왔으니 이 날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무료 코스를 산책했다. 성산 지역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기에 인사 겸 들르고 싶었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느적느적 걷가 해녀의 집 코앞까지 내려갔다. 줄무늬의 거대한 암벽이 웅장한 장면을 연출한다. 검은 돌벽과 대조되는 밝은 하늘은 비바람이 치던 어제와는 달리 맑고 깨끗했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드디어 우도를 갈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였다.


이렇게 첫 번째 걸음, 1.4km를 걸었다.


40572766-25A0-4489-ACDB-1340372CF14B_1_102_o.jpeg 해녀의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다, 하늘, 그리고 일출봉이 서로 대조되며 장관을 이룬다.
image.png 성산일출봉 무료 코스를 포함하는 첫 번째 산책 동선. (1.8km)
image.png 시내에서 성산항 선착장까지, 두 번째 산책 동선 (1.5km)


두 번째 걸음은 숙소에서 성산항까지의 거리였다. 숙소에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우도행 배를 탈 수 있는 성산항으로 향했다. 거리는 약 1.5km,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였다. 렌터카 여행이라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걸어갈 만 하다고 생각했다. 주차비 8천 원도 아까웠다. 그래서 적당히 시원하고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선착장까지 걸어갔다.


두 번째 걸음 1.5km를 더해 아침 10시에 누적 2.9km를 걸었다. 아직까지는 가뿐했다.




여객 터미널에서 배표를 구매했다. 다행히 오늘은 우도로 가는 배가 뜬다고 했다. 일정상 우도를 갈 수 있는 날이 오늘밖에 없었기에 천만 다행이었다. 그런데 배가 천진항이 아닌 하우목동항으로 간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천진항 쪽에 전기자전거 대여를 예약해둔 상황이었다. 일단 페리에 올라 선실에서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업체에서 하우목동항까지 픽업을 와 준다고 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우도 행 페리가 바다를 가르고 나아갔다. 아침 10시 경, 우도 앞바다는 환상적인 에메랄드 빛을 뽐냈다. 이제 이 해변을 시원하게 달리게 될 것이다. 우도 여행의 꽃, 자전거를 타고.


짧은 항해를 끝내고 하우목동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픽업을 약속한 장소에 갔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마자, 내가 예약한 바로 그 업체의 봉고차가 막 떠나고 있는 것이다.


날 픽업하러 온 게 아니었나? 전달이 안 됐나? 황급히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아무 안내가 없어 다시 전화를 거니 또 기다리라고 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타임 손님들과 함께 업체까지 이동할 수 있었지만 예약 시간보다 30분이 더 걸리고 자전거를 받게 됐다. 사장님은 최대한 빨리 해결해주려고 하셨지만 얼른 우도를 보고싶어 안달난 나는 기다리는 10분이 1시간 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업체에 도착한 후로는 수월하게 자전거를 빌릴 수 있었다. 응대도 친절했다. 자전거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아본다. 우도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전기자전거는 페달을 살짝만 밟아도 전기가 힘을 보태줘 언덕길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먼저 해안가를 따라 쭉, 가고싶은 만큼 자전거를 몰고, 내키는 골목이 있으면 냉큼 들어가 구석구석을 누볐다. 우도 한 바퀴를 통째로 돌았다. 어딜 가도 새파란 제주 바다, 에메랄드 빛 해변이 눈을 즐겁게 했다. 우도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다. 아무리 개발되고 상업화된다 해도 이 보물 같은 섬이 가진 자연의 빛은 가려지지 않는다.


우도 필수 코스인 땅콩 아이스크림도 먹고 기념품도 샀다. 혈당 스파이크를 막는답시고 기어를 0에 두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자전거를 멈춰세우고 걷기도 했다. 시원한 속도감은 피로를 잊게 했다. 비양도에선 자전거를 두고 섬의 끝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대략 자전거 17km, 걷기 1km를 우도에서 채웠다.


7AD1C9AC-E93A-43AC-A302-FEE803F3903F_1_102_a.jpeg 우도 바다는 색이 다르다. 선명하고 예쁜 터콰이즈 블루와 짙은 셀룰리안 블루 사이를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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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우도를 한 바퀴 둘러봤다. 정확하진 않지만 기억나는 대로 거리를 재보니 약 17km였다.


우도 여행은 즐거웠지만 육체적 피로가 차차 누적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네 시간을 꼬박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나니 성산으로 돌아가는 배에서는 사진 찍을 기운도 없었다. 조용히 쉬고 싶어 3층 갑판에 자리를 잡고 멍하니 파도를 바라봤다. 금방 성산항에 도착했다. 오후 3시 20분이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된 운동(?)에 이미 상당히 지쳐있었다. 그런데 이제 또 걷고 뛰어야 했다.


먼저, 차를 두고 온 숙소까지 1.5km를 다시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 4시에 문을 닫는 피쉬앤칩스 가게에서 꼭 밥을 먹고 싶었다. 그러려면 15분 안에 1km를 주파해야 했다. 성산항에서 식당까지 최단거리는 잘 정비된 도로가 아닌 흙밭 올레길이었다. 풍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이 헉헉대며 빠른걸음을 걸었다. 간신히 3시 40분에 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식사 되나요?'라고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막상 들으니 힘이 쭉 빠졌다. 여기 달고기 튀김을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결국 맛보지 못하고 성산을 떠나게 됐다.


이렇게 성산항에서 시내까지, 네 번째 걸음으로 1.8km를 더했다. 자전거를 제외하고 걷기만 해서 누적 5.7km였다.


C73F27AB-99F1-4106-A58B-D1015ED673C6_1_102_o.jpeg 성산항 선착장에서 성산 시내로 가는 올레길.
image.png 성산항에서 성산 시내까지 올레길로 걸어갔다. 약 1.8km.

이 날의 마지막 걷기는 종달리에서 이어졌다. 종달리는 걸어서 둘러보기 딱 좋은 크기의 작고 예쁜 시골 마을이었다. 감성 소품샵과 개성있는 카페들이 많아 젊은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지쳐있던 내게는 그 아름다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성산-우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숙소가 예약되어있는 종달리로 이동했다.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있어 코인세탁소에서 빨래를 돌리고 동네를 둘러볼 참이었다. 잔돈이 없어 허둥지둥하다 겨우 주인에게 연락을 해 만원 권을 바꾸어 빨래를 돌릴 수 있었다.


세탁 코스가 돌아가는 동안 근처의 소품샵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소품샵까지는 걸어서 1.2km. 평소라면 기꺼이 걸어갈 거리다. 그런데 차를 탈까 고민이 됐다. 이미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봐도 좁은 골목운전이 예상되는 동네라 그냥 걷기로 했다. 그렇게 왕복 2.4km를 더 걸었다. 힘든 산책을 거쳐 도착한 소품샵은 멋진 분위기로 꾸며놓았지만 내가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이후 불운이 이어졌다. 세탁에 이어 건조 코스를 돌리고는 서점을 다녀왔는데, 돌아오니 내 빨래가 꺼내져있었고 덜 말라 축축한 상태였다. 건조기를 얼마나 돌려야 할지 몰라 20분만 돌린 내 잘못이었다. 서점에 다녀오기까지 30분 정도 걸렸는데, 그 남은 10분 사이에 다른 손님이 내 빨래를 꺼낸 모양이었다. 건조기 대수가 많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왜 진작 충분한 시간을 설정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덜 마른 빨래처럼 눅눅한 기분으로 빨래를 챙겨 체크인을 하러 갔다.


숙소에서도 사진을 보고 원했던 방이 아닌 다른 방을 배정받았다.


그렇게 3.2km의 걷기를 더했다. 오늘 약 9km를 걸은 셈이었다.



8A520250-5C5E-4C42-9FE5-83B02CD39DF3_1_102_o.jpeg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종달리 마을.
image.png 종달리 동네 산책에 약 3km를 걸었다.




사실 하루 10km 걷는 게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니다. 평소에도 하루 8~9km정도는 종종 걷는다. 그런데 이 날은 유독 힘들었다. 자전거를 네 시간이나 탄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일정 사이를 '효율적으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 걷기를 '시간을 메우는 수단'으로 여긴 태도가 걷기의 장점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했다.


이동과 일정의 효율성에 매몰되어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 볼 여유를 잃어버렸다. 즐기지 못하니 피로도 더 빠르게 쌓였다.


게다가 육체적 피로가 쌓이면 마음이 즐겁기도 어려워진다. 충분히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조차 불쾌하게 해석하게 된다. 이미 지쳐 기분이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 감정에 맞게 왜곡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걷기를 멈춰야 했다. 패키지 여행마냥 가야 할 곳의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체력을 회복하고 염증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우도와 종달리. 제주도에서 가장 멋진 두 곳에 대한 기억을 좋게 가져가고 싶었다. 이제 효율과 계획은 던져버리고 비효율적인 기쁨을 찾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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