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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Jun 25. 2023

선물의 기쁨 <2021.12>







12월 4일, 

도서관 창고에서 낡은 책들을 옮기고 있을 때 비트코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꺾이더니 그날 ‘-17%’까지 떨어졌다. 말로만 듣던, 본격적인, 코인 다운 하락이었다.    



       

뭐, 괜찮았다. 

편안하게 하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모두 팔아치웠으니까. 한동안 속 끓였던 게 사라지니 속이 후련했다. 물론 손가락을 머리카락에 박고 쥐어뜯는 누군가의 부모,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누군가의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언제든지 그들처럼 될 수 있었으니까.          




돈은 은행 계좌로 옮겨놨다. 

들쭉날쭉했던 숫자가 움직임을 멈추자 돈과의 끔찍한 씨름이 끝난 것 같았고 따스한 허무가 찾아왔다. 현금은 평화 그 자체였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이었겠지만 살면서 가져본 적 없는 숫자였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먼저 백화점에 갔다. 

승리한 장군의 걸음으로, 유쾌한 기분으로 물건들을 둘러봤다. 아, 좋은 시절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물건이든 손에 쥘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옷과 신발을, 누나들을 위해 겨울 코트와 캡슐 커피 머신을, 당시 사귀던 애인을 위해 겨울 패딩과 다이슨 드라이어를 골랐다. 무거운 물건은 택배로 부쳤고 손에 쥐가 날 것 같은 쇼핑백을 가지고 다니며 혼자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부모에게 용돈을 주려고, 오만 원권이 아니라 괜히 만 원권으로, 봉투가 터지도록 돈을 쑤셔 넣었다. 아, 좋은 시절이었다.               




용돈은 침대에 올려놓았다.

택배도 잘 도착했다. 부모는 얼떨떨해했고, 누나들은 살다 보니 너한테 용돈을 다 받아본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돈이 어디서 났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쓰레기 같은 코인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더러운 비밀처럼 숨기고 싶었다. 나는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고 뻥을 쳤다. 내가 그 유명한 테슬라와 로볼록스의 주주였다고, 예전부터 주식을 공부했다고, 이제 금리 인상하니까 투자에 자신이 없어서 다 팔았다고 둘러댔다. 뭐, 상관 안 했다. 어떻게 벌었든, 훌륭하지 않든, 올바르지 않든 돈은 돈이니까.    




기부도 조금 했다.

사랑의 열매에 돈을 조금 보냈다. 

      



기쁘고 좋은 순간이었다. 

그동안 힘들었던 게 달달하게 포장되어 과거가 미화됐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고 그들이 보여준 그 웃음, 그 기쁨. 그 짧디짧은 순간들이 모든 걸 보상하는 듯했다. 그동안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경멸했었지만 녹록지 않은 삶에 빛나는 순간을 가져다 준 건 다른게 아니라 돈이었다. 돈 덕분에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이 잠시나마 가려졌고, 나 자신이 드디어 부모에게 생산적인 자식이 된 것 같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가슴과 배가 꽉 찼던 그 포만감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 기분은 돈을 번 것보다 더 오래갔다. 만약 내가 그때 투자를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투자로 돈을 벌지 못했더라면 그 시절이 훨씬 작고 어두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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