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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Aug 25. 2023

"이제 러시아에 맥도날드도 없잖아" <2023.5>








노크 소리를 들었을 때,

혼자 티비를 보며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소피에게 2시간 뒤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퇴근한 몸을 소파에 눕히고 멍청한 예능을 보다가 잠들 계획이었다. 소피와 나탸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쇼핑에서 돌아온 여자들이 덩치 큰 쇼핑백을 들고 신발을 벗었다.




“빨리 왔네.”

소피가 대답했다. “다리 아파서. 오늘 일 어땠어? 햄버거네?”     

그녀들은 싱글거리며 홍대에서 사 온 모든 물건을 새하얀 침대에 늘어놓았다. 한국적인 핸드폰 케이스, 한국적인 양말, 한국적인 자석, 한국적인 키링, 한국적인 스티커들. 부드러운 버터 빛 조명을 켜고 다 같이 침대에 앉아 구경했다. 모두 맨발이었고, 서로의 향수가 섞이고, 머리를 구부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소피는 나탸를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모스크바 한국어 학당에서 알게 된 친구의 소개였다. 첫 만남에 그녀들은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쟤는 나의 소울 메이트구나. 그녀들은 핸드폰에 서로를 ‘소울 메이트’로 저장했다. 나는 나탸를 서울에서 만났다. 소피의 소개였다. 나탸는 소피가 보고 싶어서 서울에 왔다. 목베개와 헤드셋을 끼고, 그리고 일주일 뒤에 모스크바로 돌아갈 티켓을 들고서 소피와 포옹했다. 그녀는 나와 소피가 사는 같은 호텔의 다른 방에 혼자 묵기 시작했다.        



  

“이건 오빠꺼야”

소피가 준 건 흰 양말이었다.

“고마워, 저 많은 양말은 누구 줄 거야?”

“러시아에 있는 친구들. 나탸가 나 대신 전해줄 거야.”

“모스크바?”.

“응”

나는 말했다. “전쟁 끝나면 모스크바에 가고 싶네. 이렇게 셋이  발레 보고 싶은데.”

“지금도 갈 수 있어.” 나탸가 대답했다.

“크림대교 폭파된 거 못 봤어? 그리고 이제 러시아에 맥도날드도 없잖아. 자본주의 햄버거.” 나는 먹고 있던 햄버거를 그녀에게 들어 보였다.  

“모스크바는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짝퉁 맥도날드가 있지” 소피가 대답했다.

“맛있어?”

“안 먹어 봤는데 맛없대.”

“스타벅스는?”

“있겠어?”

“아, 안돼 보드카는?”

“없겠어?”     




난 멍하니 손가락으로 코를 문질렀다.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황폐한데. 러시아 맥도날드는 죽었다. 작년 3월에. 전쟁 때문이었다. 그때 뉴스는 세계화의 상징이 끝났다고 떠들었다. 고르바초프도 죽었다. 작년 9월에. 지금은 땅속에 있다. 그때도 뉴스는 세계화의 상징이 끝난 거라고 떠들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맥도날드 폐점 소식에 실망했다. 한 시민은 1인 시위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맥도날드 철수는 폭력적인 행동이다.” 뭐, 물론 그 시민은 감옥에 갔다. 한편 러시아 시민들은 줄을 사서 빅맥을 사재기했다. 긴 줄이었다. 1990년 1월 소련이 해체되고 첫 맥도날드가 개장했던 날처럼 긴 줄이었다.   




1990년 1월 모스크바에 처음 문을 연 미국 맥도날드 매장



  

풍경이 바뀌었다.

다시 제국이 제국을 짓누르고 다시 인격체가 인격체를 죽인다. 평화는 끝났고 세상은 조각났다. 미국 편과 러시아 편으로. 러시아에서 서구 자본주의 상징들이 빠져나갔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그리고 소피가 좋아하는 나이키까지. 대신 러시아에 맥도날드 비스름한 게, 스타벅스 비스름한 게 생겨났다. 영원히 군림할 것 같던 사업들이 순식간에 끝났다.               




나는 소피에게 물었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로 돌아갈 거야?”

“글쎄, 내 달러 월급은 어떻게 하지? 그리고 우리 회사는 페이스북을 사용해야 해. 러시아는 그걸 차단했어. 전쟁이 끝났다고 규제를 풀어줄까?”




없겠지. 그녀는 미국 마케팅 회사에서 일했다. 그녀가 속한 부서는 원격으로 일을 했다. 일의 특성상 그들 모두 페이스북에 접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페이스북을 차단했다. 전쟁에 대한 가짜 뉴스 진원지라는 이유로. 그게 그녀가 러시아를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는 이유였다. 자신 명의의 집도, 할머니와 여동생도 두고, 친구들도 두고. 유대인답게. 그래서 나는 그녀를 ‘유목민’이라 불렀다. 아, 유대인 다운 별명이었다.  



         

소피가 보여준 사진이 기억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모르스(Морс, Mors)를 마시며 카드게임을 하는 사진, 마음 편한 집에서 옥수수를 뜯어먹는 사진. 지금 보면 감동적일 정도로 순진하던 시절이다. 그녀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있는 할머니에게 송금을 못한다는 것을, 그곳에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한국인 남자친구를 만날 거란 것도.     



     

늘어진 몸을 소파에 기대고 말없이 그녀들을 응시했다.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일 때 태어난 여자들, 총소리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서울까지 온 맨발의 여자들. 우크라이나 친척과 모스크바 친구들에게 안녕을 전하는 여자들. 그 여자들은 황당할 만큼 빠른 러시아어로 침대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따금 서로의 귀고리를 만지작거렸고 이따금 서로의 엄지손톱을 만졌다. 서로 상냥한 고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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