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45

내가 사라진다면

by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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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에게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20일은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를 타고나자 전화가 왔다. 아주 형식적인 인사에 나도 형식적으로 대꾸했더니 그러고는 대화가 끝났다. 그의 학년 역시 오늘 현장학습을 가기에 잘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수학여행 내내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3일 후, 피곤에 절어서 도착했더니 많은 선생님들이 조회대 앞에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한마디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버렸다. 캐리어에 종이가방까지 들고 낑낑대며 운동장 계단을 올라가는 나를 보고 망설이는 게 안 보고도 느껴질 정도였지만 못 본 척 혼자 힘들게 올라갔다.

결국 그 정도 망설임이 전부인 사람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났더니, 마주치는 것마다 짜증이 났다.

오늘은 급식소에서 그의 동학년 선생님들끼리 모여 신나게 수다를 떨며 밥을 먹고 있었다. 교생이 온 덕분일 것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저절로 얼굴이 어두워진다. 황급히 옆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활짝 웃게 된다. 이유를 모를 짜증스러움이 하루 종일 지치게 만든다.


어렵디 어렵게 진심을 내보인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대해주는 사람이 존재할까.

그 사람도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남자지만, 어쩔 수 없이 제발 조금이라도 달라주기를 바랐나 보다. 그저 그뿐인 사람이다.

세 번째라도 좋다는 필사적인 글에 그저 미치겠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술에 취해 그의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도 다음 날 옆집아저씨가 불러내 얘기했다는 게 쪽팔릴 뿐이고,

틈만 나면 연락하던 이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아도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절대 연락하지 않는, 그저 그만큼의 사람일 뿐이다. 나는 그만큼의 인연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만큼인 사람을 지금껏 마음에 담아왔는데.

지금도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마음에 담아둔 걸 내치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는데.


휴직하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무너질 것 같다.



4월 28일


아침에 학교를 가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딱 마주쳤다. 웬일로 걸어서 학교를 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여전히 그대로였다. 학년에 무슨 일이 있는지 한잠도 못 잤다며 투덜댔다.


나만 보면 힘든 소리만 한다고 했더니 이런 얘길 누구한테 하겠어.. 라며 입에 발린 소리나 한다.



5월


아침에 일어나 곱게 정리한 이불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었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그런 생각을


내가 사라졌으면
내가 사라진다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듯이


오늘도 어제처럼 열심히는 살고 있어
이렇게 살다 보면 내가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기겠지 이렇게 살다 보면


세상에 모든 게 잠들어버린 창 밖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사라졌으면
내가 사라진다면
잠깐만이라도 이 자리에 없었던 듯이


오늘도 어제처럼 열심히는 살고 있어
이렇게 살다 보면 내가 사라지면 안 되는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겠지


언젠가 지금보다 행복한 일들도 생기겠지
이렇게 살다 보면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내가 사라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5월 14일


표면적으로는 아무 특별한 일 없는 오늘의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


책임이고 질책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정말 이대로는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제발 빨리 미쳐버렸으면 좋겠다.


치졸하고 찌질하게 이런 삶을 부지하는 일을 끝내버릴 수 있게.


넌 그냥 입 다물어.
어차피 나를 살고 싶게 도와주지도 않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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