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으로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46
오랜만에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 사람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현관 쪽으로 나갔다.
얇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주일 된 애인과 다정하게 통화를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원룸 안은 처음부터 나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따뜻한 사랑의 말들로 채워졌다. 그 목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감정은 실망과 가까웠다.
세 번째라도 좋으니 곁에 있게 해 달라는 불행한 아이를 유리문 하나 건너에 둔 채 다정하게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저 그뿐인 사람.
밤중에 그 불행한 아이를 홀로 보낸 그저 그뿐인 사람.
실망이라는 감정은 의외로 이 불행한 아이를 비로소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나 보다.
아니, 밟히고 밟히고 짓밟히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벌레 한 마리도 기어코 내게도 제대로 살 권리가 있다며 외치고 일어나는 것 같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사람이 내뱉은 날카로운 가시들이 빼곡히 박혀 이제 더 이상 박힐 곳이 없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이따위로 더 이상은 살 수 없겠다.
사람의 감정을 벌레 짓밟듯이 밟아버리고는 자신이 그랬는지조차 모른 채 환하게 웃는 이런 상황을 이젠 견딜 수 없다.
그저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곁에 두면 편하고 도움도 되니 옆에 두고 써먹는 소모품 같은 존재로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네가 원해서 그렇게 한 거잖아. 난 바란 적도 없는데 네가 귀찮게, 진상 떤 것뿐이잖아. 왜 나를 나쁜 남자로 만드는 거야?-
응. 맞다. 모두 나 혼자서 벌인 연극일 뿐. 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은데 내가 억지로 무대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내 대답은 한 가지다.
내가 미안합니다. 가만두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그 사람은 감정조절능력이 뛰어났다. 자제심도, 현실과의 타협 능력도 또한.
그래서 그런 능력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의 절망적인 심정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같이 섞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을지, 그게 너무 슬프다.
지금도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고, 보고 싶지 않은 만큼 보고 싶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의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아놓는 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게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난 생각도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벌레쓰레기가 아니야.
높이높이 날아오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멋지게 살 것이다. 그리고 가장 멋진 곳까지 다다랐을 때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내가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울 때.
당신은 그 순간에도 변명이나 늘어놓을 그저 그뿐인 사람일 테니.
삶에의 미련은 사라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