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까지 처방받은 약을 꼬박꼬박 먹으며 일상을 버티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먹고 있는 정신과 약은 일상을 딱 '버티게끔'만 해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서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머릿속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죽지는 않지만 죽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단지 이렇게 버티는 상황이 아니라 병이 제대로 호전되는 것이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이러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좀 더 나아지고 싶다며 약을 바꿔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의사 선생님은 내 말을 듣더니 살짝 못 미더운 얼굴로 알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뀐 약을 먹었고, 일상은 지옥이 되었다.
자잘한 것들을 제외하면 크게 네 가지 부작용에 시달렸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살충동이었다. 자살충동이야 늘 내 몸속을 수분처럼 채우고 있었던 것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말 당장이라도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감쌌고, 눈을 감으면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방법들이 하나둘씩 계획적으로 떠올랐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고 무기력했다. 영화에서 정신병원에 갇히거나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등장인물들이 왜 하나같이 의자에 멍-하게 앉아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말 이상했다. 우울증 약의 부작용이 자살 충동이라니. 자살을 하고 싶지 않게 해주는 약의 부작용이 격렬한 자살 충동이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필 이 시기에 엄마가 내 상태를 확인하시려고 본가에서 올라오셨고, 나는 엄마에게 내 가장 밑바닥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소파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TV는커녕 대화도 힘들었고, 엄마는 속상한 내색을 하지 않으시려 일부러 우리 집 청소를 더 열심히 하셨다.
두 번째 부작용은 식욕감소이다. 사실 감소 정도가 아니라 식욕이 아예 0으로 수렴했다. 이렇게까지 식욕이 없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무엇도 먹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먹는 중에도 음식은 나무토막같이 아무 맛도 없었고, 평소에는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연어나 마라탕을 생각해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비정상적인 식욕 감소 덕분에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했고, 그 결과 약의 부작용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식욕이 너무 좋아서 살찌는 것을 고민했던 내가 이렇게까지 변한 것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식욕감소가 아니었다면 나는 약의 부작용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기립성 저혈압이다. 앉았다가 일어나기만 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며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이 전에도 가끔씩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면 머리가 핑 돌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앉았다가 일어서기만 하면 무조건 저혈압이 왔다. 핑 도는 정도가 아니라 주저앉거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말이다. 기립성 저혈압은 평소에도 있던 증상이라 처음에는 약 부작용인지 전혀 몰랐다.
네 번째는 지루성 두피염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두피 전부가 염증으로 뒤덮였다. 가렵고 따갑고, 볼록하게 여드름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사용하던 약용 샴푸를 써도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증상은 약 부작용인지, 약 부작용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심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머지 부작용들은 약을 끊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지루성 두피염만은 끈질기게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 네 가지 부작용들을 겪으면서 어느 순간 나는 이 증상들이 약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금요일부터는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 없이 그냥 투약을 중단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났고 출근을 했는데, 놀랍게도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었다. 식욕이 조금씩 생기고, 자살 생각이 줄어들고, 저혈압이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이것이 무시무시한 약 부작용임을 깨닫고 다음 예약일에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의사 선생님께 잘못했다고 했다. 멋대로 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대가로 돌아왔다고 말씀드렸다. 의사 선생님은 '잘못했다고 하길래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한 줄 알았네요'라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리고는 이것 역시 결국은 내가 더 좋아지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행동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며 격려와 위로를 해 주셨다. 너무 면목 없고, 죄송하고, 감사했다.
원래 정신과 약은 같은 증상이라도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고 한다. 성분의 함량과 부작용도 각기 다르다. 정신과 약 처방을 처음 받았을 때 약 이름으로 성분 검색을 해 본 적이 있다. 약의 효능보다 부작용이 훨씬 길었던 기억이 난다. 자살 충동, 식욕 저하, 무기력, 졸림, 하품, 손발 저림... 그때는 그냥 한 귀로 흘리듯이 지나갔었던 낱말들이 바로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의사 선생님이 신중하게 골라 주신 약을 믿고 먹을걸'하는 후회도 했지만, 그래. 죽지 않은 게 어딘가. 그걸로도 잘 넘긴 것이다.
약은 다시 원래 먹던 약으로 바꿨고, 부작용을 앓기 전보다 약간 더 좋아진 것 같다.이번에는 의사 선생님과 나를 믿고 꾸준히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