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공간과 채워진 시간
2부 EP06. 빈집
바쁜 날들의 연속이다.
펍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중 L의 친구 H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협재 바다에서 새벽 네 시까지 영업을 하는 포차의 사장으로, 인근에 솥밥집까지 같이 운영하고 있다. 포차는 인테리어도 감성적이고 메뉴도 맛있어서 나는 곧바로 단골이 되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H가 자기네 가게 일을 도와주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그리하여 요일을 나누어서 솥밥집, 포차, 펍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계산을 해보니 월, 화, 수요일은 대략 10시간 정도 일을 한다.
몇 주간 그렇게 일을 하고 났더니 온몸이 아프다. 목, 어깨, 무릎, 발목, 손가락까지. 서빙은 할만하다 쳐도 설거지가 정말 힘들었다. 특히 포차에서는 홀서빙보다는 설거지의 비중이 더 높았는데, 무거운 사기그릇을 거의 8시간 정도 닦다 보니 손가락 관절이 아프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육체노동은 쉽지 않음을 절감하고 있다. 그런데 대신 정신은 정말 편하다. 퇴근할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퇴근할 때 차 안에서 소리를 마구 지르면서 운전을 한다. 퇴사 전에는 퇴근을 해도 내일 출근할 생각에 미칠 것 같았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열심히 산다.
오늘은 육지에 있는 집의 전세자금대출 연장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다. 매달 전세자금대출에 대한 이자만 35만 원 정도씩 빠져나가는데, 그렇다고 집을 처분하기엔 집 안에 있는 짐들이 너무 많아 처리가 어려워서 방치 중이다. 또한 제주살이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육지의 집을 처분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은행에 가서 대출을 다시 1년 연장하고 전세 재계약을 했다. 빠져나가는 이자가 아깝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은행 업무를 보고 나서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육지로 올라와 근황을 보고하고 약을 처방받는다. 제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평소 감정 상태는 어떤지 등을 보고한다. 확실히 평상시의 기본 텐션 자체는 퇴사 전보다 오른 듯하다. 하지만 중간중간, 앞으로 뭘 해 먹고살지에 대해 생각이 닿으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직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불안에서 나오는 우울감은 묵직한 펀치 한 방처럼 나를 치고 간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복용하는 약을 유지하자며 같은 약을 한 달치 다시 처방해 주셨다. 그리고 진료를 위해 제주에서 여기까지 오게 하는 게 너무 미안하다며, 제주에 있는 병원을 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나는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싶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말하는 이상한 의사도 있는 판국에, 지금 선생님처럼 좋은 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너무나 반가운 사람들, 별군과 박을 만났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건데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편하게 웃고 장난을 친다. 다들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잘 지내보여서 좋았다. 이제 나만 잘되면 된다. 우리는 밥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집에 오니 한 달간 방치된 집에서는 퀘퀘한 냄새가 났고, 키우던 식물들은 다 죽어가고, 보일러는 고장이 나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세수만 겨우 했다.
분명 생명이 없는 집일 뿐인데, 미안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식물에 물도 주고, 창문도 활짝 열어 놓고 적당히 정리도 했다.
미안해, 미안.
올해도 주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우리 집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