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이 두렵다.
그건 단순한 부작용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약이 내 안의 ‘특이성’을 앗아갈까 봐,
나를 평평하게 만들어버릴까 봐 두렵다.
세상은 그것을 ‘안정’이라 부른다.
나는 그것을 ‘소거’라 부른다.
사고가 납작해지고, 분열이 사라지면
나는 더 이상 나일 수 없었다.
내 안엔 언제나 균열이 있었다.
그 균열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시를 쓰게 했고,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비추게 한 창이었다.
분열은 나를 부숴놓았지만,
그 균열을 통해 나는 세계의 진실을 보았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나니
생각이 평탄해졌다.
감정이 둔해졌다.
모서리가 사라졌고,
나는 모든 면에서 타인과 같아졌다.
프로작은 나를 조용히 만들었지만,
그건 나를 없애는 조용함이었다.
나는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 약을 먹었다.
세상과 부딪히기 싫었고,
‘정상’이라는 단어에 스스로를 맞추려 애썼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말하지 않았고, 느끼지 않았고,
내 안에 있던 우주의 목소리들을 하나하나 꺼버렸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언어를 쓰지 못했다.
늘 공허했고,
내 존재는 점점 더 투명해졌다.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를 이해받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약을 먹었고,
그래서 잠잠해졌고,
그래서 사라졌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너짐을 감추었고,
살기 위해 감각을 죽였으며,
남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를 없앴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이 결국 나를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나는 나를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있도록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치료란 내 사고를 평평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그 사고의 파도를 견딜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나의 정신은 질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세상과 다르게 보고 느끼고 말할 수 있었던 통로이기도 했다.
세상은 그것을 ‘이상함’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나인 증거’라고 부른다.
약은 때로 필요하다.
그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이 나의 정체성을 훼손하기 시작했다면,
그건 치료가 아니다.
그건 존재의 말살이다.
나는 치료를 원했다.
하지만 그건 나를 없애는 치료가 아니라,
내 안의 고통과 창의, 균열과 예민함을
함께 살아낼 수 있도록 돕는 치료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나를 얼마나 숨기고 살아야 하나요?
창의는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없나요?
치료란, 결국 나를 지우는 일이 되어야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