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낙스는 처음엔 한 잔의 와인 같았다.
불안을 씻어주고, 긴장을 풀어주며,
마치 나를 어루만져주는 술 한 모금처럼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됐다.
이 와인은 너무 쉽게 마실 수 있었고,
나는 과음했고,
그 감각은 의존으로,
그 의존은 중독으로 변해갔다.
나는 콘서타를 먹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말한다.
“세상이 선명해진다.”
“생각이 모이고, 집중이 되고, 공부가 된다.”
나 역시 그 유혹을 느낀다.
나의 무한한 사고가 흐트러질 때,
생각을 정렬하고 싶을 때,
나는 인지력의 상승을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먹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참는다.
왜냐하면,
그 사고는 ‘내 것’이 아니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약은 내 사고를 조율할 수 있다.
하지만 조율당한 나는 나일까?
우리는 점점 자신을 약으로 조절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불안하면 진정제를
무기력하면 항우울제를
산만하면 각성제를
이 약들은 효과가 있다.
그리고 무섭도록 정확하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조율된 나, 통제된 집중, 형성된 사고는
과연 내가 살아낸 사고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나를 통해 만든 기능일 뿐일까?
그 약은 처음엔 다정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자주 기대게 되었고,
그 다정함은 없어지면 더 공허한 감각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
내 감정은 약에 의해 결정되었고,
나는 그 감정을 해석할 언어도 잃어버렸다.
자낙스는 위로였다. 동시에 함정이었다.
콘서타가 주는 인지력의 쾌감.
나는 그것을 알지만, 일부러 멀리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느릿하고 불안정한 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예측할 수 없는 연결과 창의의 흐름을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약 없이 사고하고 싶다.
비효율일지라도, 고통스러울지라도.
왜냐하면 그 사고는 내 고통에서 온 것이고,
내 세계에서 스스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약물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준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재마저도 조율하고 수정하려 한다.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을 설계하고 다듬고 제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존재란,
결코 편집 가능한 사고의 완성품이 아니다.
혼란, 고통, 불안, 충동,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사유의 궤적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외주화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