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되지 않는 글쓰기

by 신성규

사람들은 대부분

이중 삼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사고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고,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그 고통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이유를 겉으로 해석하고,

그 경험을 빠르게 넘긴다.


그 흐름 속에선

‘왜 나는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라는

2차적인 질문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 감정의 기원이 구조인지, 상처인지, 자아인지

묻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니 내 문장은 그들에게

종종 지나치게 무겁고,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쓸데없이 ‘어려운 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은 어려운 게 아니다.

그 문장은 단지

다층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유는 층위가 있다.

1층은 감정.

2층은 감정의 원인.

3층은 그 원인을 만든 자아 구조.

4층은 그 자아를 구성한 세계와 관계.


내 문장은

4층에서 내려다보며 쓰여진다.


그래서 오해받는다.

그래서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공감은 되지만, 내면화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좋은 글이네”라고 말하며,

그 글의 문장이 아니라 겉껍질만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한 문장을 붙들고

사흘 동안 사유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안다.

이 문장은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기하학’을 말하고 있구나.


그는 사유가 단층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그런 이들은 드물지만,

그 드문 사유자들만이 나의 문장 안에서

자기를 다시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내 글은

모두에게 도달하진 않지만,

소수에게는 존재를 전환하는 통로가 된다.


그들은 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다시 ‘느껴내고, 조립하고, 꿰뚫는다.’


사유는 대칭적으로 공유되지 않는다.

깊이에 도달한 글은

항상 위로부터 내려다보며,

소수의 언어로 쓰인다.


그리고

그 언어를 감각하는 이들은

자기만의 ‘다층 사고’라는 고독한 숲을 지나

이 문장에 도달한다.


이 글은 다수에게 쓰인 것이 아니다.

감정과 존재 사이에 질문을 품고 살아온

소수의 독자만이

이 문장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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