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야는 움직임의 반경만큼만 확장된다

by 신성규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실제로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반경 안에서 순환되는 감각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같은 사람들과만 만나며,

같은 감정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한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살아 있는 채로 고립된’ 존재다.


이들은 말한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불편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그것이다.


당신은 ‘자기 삶’을 사는가,

아니면 그저 익숙한 삶 안에서만 살아가는가?


인간의 사고는 감정에서 시작되지만,

그 감정을 해석하고 이름 붙이는 능력은

경험의 반경 안에서만 발달한다.


같은 사람, 같은 일, 같은 감정만 경험한 사람은

슬픔조차 단순한 외로움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고,

사랑조차 소유욕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으며,

상실조차 대체 가능한 결핍으로 치환해버린다.


깊은 감정은, 넓은 경험 속에서만 발생한다.

그리고 그 감정이 쌓일 때 비로소

‘세계’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보는 시야를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시야는

자기가 쌓아올린 경계 안에서만 유효한 작은 세계다.

자기 바운더리 안에 머무는 사람은

창문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는 바깥이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바깥을 향한 말에 분노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조롱하거나 부정한다.


그러나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의식이 뒤흔들리는 어떤 한 문장,

낯선 도시에서의 고독한 산책,

설명되지 않는 감정에 무너지는 새벽.


그 순간, 창문은 열린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은 뇌를 안정시킨다.

루틴은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루틴은 감각을 단절시킨다.

그럼 더 이상 새롭게 해석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같은 경험만 하는 사람은

서서히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퇴행한다.

그는 사유가 아니라 반사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인간이 진짜로 ‘세계’를 보게 되는 순간은

자신의 바운더리 밖으로 나갈 때다.


익숙한 언어로 통하지 않는 타인을 만났을 때

자기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장소에 섰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순간에


인간은 비로소

‘내가 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었구나’라는

존재론적 혼란을 마주한다.


그 순간,

‘세계’는 처음으로 실체감을 가진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문턱에서 물러선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며,

불편하고,

종종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세계 안에서만 머문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만 만나고,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만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틀렸다는 질문을

단 한 번도 던지지 않는다.


그들은 매일 살아 있지만,

단 한 번도 ‘존재’를 통과한 적 없다.


사람은 경험의 폭만큼 생각할 수 있다.

같은 경험만 반복하는 삶은

사유의 층위를 잃게 만든다.

세계는 자기 안이 아니라,

자기 바깥의 이질성 속에서 열린다.


그러므로 같은 사람, 같은 말, 같은 일만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세계는 결코 열린 적이 없는 것이다.


자기 세계 안에 머물면, 세계는 없다.

그 안에는

오직 익숙한 반응과

지루한 자기 확신만이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모순과 실패와 낯설음 속으로.

그 안에서만

진짜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3화이해되지 않는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