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한 장면을 보았다.
작고 낡은 경차에 네 명의 가족이 탑승해 이동하고 있었다.
어린아이 둘, 그리고 부모로 보이는 남녀.
그 차는 작았고, 무언가 불편해 보였으며,
나는 그들을 보며 잠시 ‘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서 오만을 보았다.
그들의 삶을 모른다.
그들의 기쁨, 그들의 연대, 그들의 웃음,
그 작은 차 안에 흐르는 따뜻한 공기까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더 안다’는 듯한 위치에서
그들을 판단했다.
그 판단은 나를 철학적 사유로 이끌었다.
나는 언제부터, 어떤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해석하고 평가할 권리가 생겼는가?
철학은 종종 ‘앎’에서 출발하지만,
진짜 철학은 ‘알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 경차 안의 가족은 나보다 더 충만할 수도 있다.
그들의 삶엔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밀도 높은 사랑과 견고한 신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외형을 보고 내면을 추론했다.
마치 소비사회가 나에게 가르쳐준 가치척도—
‘크기, 신상, 넓이, 편의성’—를 무비판적으로 내면화한 채
그들을 딱하게 여겼다.
그것은 오만이었다.
그리고 철학자라 자부하던 내가
가장 기본적인 질문조차 잊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타인을 판단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진실을 알 수 없기에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가 윤리적으로 유예되어야 한다.
그 작은 차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배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가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