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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후작은 신학자에 가깝다

by 신성규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신이 전능하다면

신은, 신의 영광이고 너희들이 자랑하는 미덕이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왜 막지 않고 내버려둘까?”

– ’소돔의 120일‘ 속 공작의 선언


이 문장은 종교와 도덕,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모욕처럼 들린다.

사드 후작은 단순히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정론 자체를 파괴한다.

이는 단지 무신론자의 도발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신학적 사유의 구조 안에서, 그 구조를 자기 파괴적 논리로 붕괴시키는 철학자였다.



신학은 늘 악의 존재를 설명하려 애썼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있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방어 논리(신정론)는 다음 세 가지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신을 믿는 이들이 악의 존재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세운 논리의 버팀목이었다.


첫째로, 일부는 말한다.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지 못한 이유는, 신의 힘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붕괴시킨다.

전능하지 않은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그는 인간보다 조금 나은 존재일 뿐,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드는 이를 간단히 치워버린다.

“전능하지 않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너희는 허상을 믿고 있다.”


둘째로, “신은 선하지 않다”는 가설이 있다.

신은 존재하지만, 그 신이 반드시 선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실존적 절망을 초래한다.

악한 신은 절대권력을 쥔 폭군일 뿐이며,

우리는 그 신의 세계 안에서 영원한 희생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드는 여기에, ’소돔의 120일‘이라는 거울을 비춘다.

그 안의 공작과 사디스트들은 마치 신처럼 군림하고,

미덕을 가진 이들을 학살한다.

이것이 신이라면, 우리는 도덕적 환상 속에 속고 살아온 것이다.


셋째로, 가장 보편적인 방어는 다음과 같다.

“악은 시련이다.”

신은 전능하고 선하지만,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 고난을 허락한다는 주장이다.

이 해석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사드는 이 믿음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해부한다.


’소돔의 120일‘의 고문은 단지 잔혹한 설정이 아니다.

그것은 신정론의 시련 개념을 박살 내기 위한 철학적 시뮬레이션이다.


거기엔 극복 가능한 고난이 없다.

고문은 아이들에게 가해지고, 그들은 죽는다.

시련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성장도, 성찰도, 구원도 없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시련”이라 부르기 위해서는,

신이 어린 미덕의 양들을 일부러 고문하고 죽인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신은 전능하지만 선하지 않으며,

가장 약한 자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는 절대악에 가깝다.


이는 ‘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는 기독교 신학의 정체성을 뒤엎는 결론이다.


사드가 만든 잔혹한 상상은 실제로는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신정론을 붕괴시키기 위한 철학적 장치,

그리고 윤리 없는 신을 거부하기 위한 도발적 논증이다.


결국 사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신이 존재하되, 선하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를 경배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구축해 온 신정론의 성채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 설명했다.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선을 등질 때 발생하는 ‘결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돔의 120일‘에서 아이들은 어떤 자유의지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고하며, 단지 미덕을 지녔다는 이유로 선택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된다. 자유의지가 없는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은 이 극단적 상황 앞에서 침묵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악을 허락하는 이유를 더 큰 선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악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더 큰 정의와 질서로 귀결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사드는 말한다. 더 큰 선을 위해 아이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신은, 그 자체로 선하지 않다. 만일 누군가가 ‘선’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생명을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이레나이우스 계열의 신학자들은 고난을 통해 인간이 성숙하고 완전해진다고 보았다. 고난은 시련이고, 시련은 성장을 낳는다. 하지만 사드는 이를 철저히 해체한다. ‘소돔의 120일’에서의 고난은 아무런 성장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살해되며 끝나는 존재들에게 성숙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레나이오스의 ‘성장론적 신정론’은 여기서 무력해진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신의 초월성과 신비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적 기준으로 신을 재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드는 묻는다. 그렇다면 신은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는 존재인가?

그 신이 과연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으니 경배하라”는 명제는 도덕적 회피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처럼 사드는 각 신학자들이 고심 끝에 구축한 신정론의 방어선을 무너뜨린다. 그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상상력이 아니라 철저한 논리의 전복으로 그것을 해체한다. 신을 제거하는 대신, 신을 끌어들여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다.


사드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악일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을

신학적 논리 내부에서 제기한 아이러니한 신학자였다.

그의 외설적 상상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정론이라는 도덕적 질서 자체에 대한 정면 반란이었다.


“신은 없다”는 그의 선언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런 신이라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판단이자 철학적 선언이다.






하지만 내가 신을 변호해보자면, 의견은 다음과 같다.

사드 후작은 ’소돔의 120일‘에서 어린 아이들이 겪는 고문과 죽음을 통해

“시련”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선하지 않은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매우 급진적이고 감정적으로 강력한 도발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반박의 여지가 있다.


고통은 항상 시련이 아닐 수도 있지만, 시련이 항상 즉각적인 구원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


사드는 시련을 극복 가능한 고통으로 한정하며,

극복되지 않고 죽음에 이른 고통은 시련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시련의 정의를 지나치게 협소화한 것이다.


실제로 성서적 시련, 예컨대 욥기의 고난이나 순교자의 죽음은

극복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순교자는 죽지만, 그의 죽음은 그 공동체의 믿음을 새롭게 한다.

또한 고통은 당사자에게는 해석되지 않더라도,

그 고통을 목격한 자, 이후 세대에겐 의미의 맥락을 창출한다.


고통은 단지 개인의 성장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 반성과 각성을 유도하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즉, 소돔의 120일 속 아이들의 고통조차

그 자체로는 참담하고 절망적이지만,

그 고통을 바라보는 독자, 인류 전체에게

절대악의 허용 가능성과 윤리적 경계를 직면하게 만든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역사적 시련이자 경고가 된다.


사드는 ’소돔의 120일‘에서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고통을 인위적으로 창조해낸다.

그는 말 그대로 ‘신정론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극단 상황’을 실험실처럼 설계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하나의 극단적 사례일 뿐이며,

전 우주적 차원에서 악과 고통이 반드시 이처럼 의미 없음으로 귀결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가 묘사한 세계는 의도적으로 희망과 회복의 요소를 제거한 세계다.


이는 철학적 반례가 되기보다는, 감정적 동의 유도에 가깝다.


현실의 고통은 그렇게 완벽하게 절망적이지 않다.

사드의 텍스트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적 쇼크를 위한 문학적 연출이다.

우리는 그것을 철학적 논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윤리적 경계 실험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드가 제기한 고통과 악에 대한 질문은 무겁고 정당하다.

그러나 그의 논리 구조는 전능, 선함, 시련이라는 신정론의 틀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감정적으로 몰아가며 공격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시련은 반드시 극복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존재한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드의 문장은 날카롭지만,

그 날카로움은 결국 인간 윤리에 대한 도전이지,

신 존재 자체를 논리적으로 부정하는 무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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