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위대한 인물들의 뇌를 바라본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하고, 음악가의 해마를 스캔하며, 수학 천재의 두정엽을 측정한다. 그리고 말한다.
“여기가 커서 천재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부위가 커서 천재가 된 것인가, 아니면 천재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부위가 커진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본질에 관한 문제다.
비슷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말한다.
“근육이 커서 힘이 세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반복적으로 힘을 쓰는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근육이 커진 것이다.”
결국 근육이 크다는 것은 결과이자 증거일 뿐, 반드시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뇌도 마찬가지다.
특정 영역이 크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반복적으로 특정 방식으로 사고했다는 자취일 수 있다.
천재이기 때문에 뇌가 그렇게 된 것이지, 뇌가 그렇게 생겨서 천재가 된 것이 아닐 수 있다.
뇌과학은 오랜 세월 뇌를 정적인 기관으로 보아왔다.
“이 부위는 언어,” “저 부위는 계산,” “이 크기는 기억력”이라는 식으로 나누며 분석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신경가소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며 그 관점은 바뀌었다.
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사용에 따라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명상을 꾸준히 하면 전전두엽의 회백질 밀도가 증가하고,
악기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면 청각 피질과 운동 피질이 발달하며,
한 언어를 깊이 연구하면 브로카 영역이 확장되기도 한다.
사유는 흔적을 남긴다.
반복된 사고는 뇌에 구조적 변화를 남기고, 그것은 곧 행동 이전의 조건이 아니라, 행동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는 천재를 타고난 존재로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며, 그 다름은 어떤 물리적 구조에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나는 저런 뇌를 가지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저렇게 살 수는 없지.”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약 천재의 뇌는 천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핑곗거리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뇌를 가지게 될지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는 자유이고, 동시에 책임이다.
천재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새겨나가는 사람일지 모른다.
뇌는 돌덩이가 아니라 점토다.
무엇을 반복해서 생각하느냐, 어떤 사유에 집착하느냐,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는 바뀌고, 연결은 강화되며, 구조는 새롭게 조립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이지,
“어떤 뇌를 타고났느냐”가 아니다.
어느 영역이 크다는 것은 천재의 좌표를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라,
천재적 삶이 지나온 발자국이다.
그 흔적은 뇌에 남고, 그 뇌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여기를 많이 사용했다.”
그렇다면 묻자.
당신은 지금, 어떤 부위를 가장 많이 쓰고 있는가?
그것이 곧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고의 길이자,
당신 뇌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