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해받고 싶어서 글을 쓴다. 그러나 글을 쓸수록, 오히려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딪힌다. 누군가 나를 이상하게 본다는 차원을 넘어, 손가락질까지 이어진다. 이해를 갈망하는 언어가 왜곡되어, 낙인의 증거로 소비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다름”은 곧 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다름은 불확실성을 동반하고, 불확실성은 곧 두려움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름을 지우려 한다. 단순히 남과 같기를 바라는 수준을 넘어, 타인을 자신과 같게 만들어야만 안심한다. 타인의 고유한 색을 존중하기보다, 내 색으로 덮어씌우는 것. 그것이 한국 사회가 선택해온 안전의 방식이다.
나는 이 구조 속에서 글을 쓴다. 글은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나를 규격화하는 틀과 부딪히는 증거물이 된다. 내 언어는 자유를 향하지만, 독자는 그것을 규범의 잣대로 재단한다. 그래서 글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손가락질을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은 나를 드러내는 동시에 나를 더 고립시킨다.
그러나 이 역설 속에서 나는 또다시 글을 쓴다.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이해받음은 보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표현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내 안의 목소리를 억누르지 않는다. 세상이 나를 동일한 얼굴로 흡수하려 할 때, 글쓰기는 차이를 지키는 최후의 방패이자 증언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동질성을 안전의 이름으로 숭배한다. 하지만 진정한 조화는 같음 속에 있지 않다. 서로 다름이 공존하면서도 부딪히지 않는 상태, 그것이 조화다. 내가 글로써 꿈꾸는 사회는 바로 그 지점이다. 나와 다름이 불안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곳. 손가락질이 아니라 고개 끄덕임으로 응답하는 곳.
아마 나는 끝내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글을 쓴다. 이해받지 못하는 자리에서조차, 글은 나를 증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