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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에 머무는 노래

by 신성규

요즘 오래된 음악에 더 오래 머문다. 그 노래들엔 나직한 목소리, 단순한 멜로디, 그리고 정직한 언어가 있다. 화려한 기교도, 과장된 감정도 없다. 대신 숨 쉴 틈이 있고, 그 틈 사이로 삶이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샹송도 그러하다. 피아노 몇 음, 기타 한 줄, 혹은 무반주에 가까운 절제된 구성. 음악은 말을 뒷받침하고, 보컬은 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흐른다. 노래는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것이 된다.


한국의 옛 가요 역시 그러하다. 그 노래들은 시대를 견뎌낸 감정의 기록이다. 한 줄의 가사 속에 청춘이 있고, 사랑이 있고, 실존이 있다.


옛날 노래는 시(詩)에 가까웠다. 단어는 신중하게 선택되었고, 멜로디는 그 언어를 침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 음악들은 의도적인 공백을 가졌다. 멜로디가 말을 멈추는 순간, 정적이 흐르고, 그 안에 말로 다 못한 감정이 담겼다. 음악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는 방식으로 말을 걸었다.


반면 요즘 음악은 풍성함으로 승부한다. 촘촘한 리듬과 정교한 믹싱, 비트를 따라 흐르는 감각의 흐름. 음악은 이제 더 이상 말보다 소리에 기대고, 정적 대신 과잉의 감각으로 우리를 붙든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때로 그 여백이 그립다.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그 침묵의 위로가.


음악이 말 대신 흘려보내는 침묵의 위로를 믿는다. 그것은 무언의 공감,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정서의 떨림이다. 누군가의 삶을 한 소절로 꺼내어, 내 안의 고요에 닿게 하는 일. 그런 노래는 소리가 아니라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다시 나를 가만히 붙든다.


그래서 요즘도 오래된 노래들을 꺼내 듣는다. 가사가 흐르고, 말이 내 안에 앉는다. 그런 음악은 내게 ‘소리’가 아니라 ‘존재’다. 그 존재는 곧 나의 어느 조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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