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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의 행복론

by 신성규

인간의 지속가능한 행복은 몰입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늘 결과를 갈망하지만, 그 결과는 순간의 허망함만을 남긴다. 반대로 과정 속에 스며드는 몰입은 우리의 ‘나’를 잠시 잊게 하고,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함을 일깨운다.


톨스토이는 광활한 농지를 밟으며 흙을 만지고,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한없는 해방감을 경험했다. 그의 의식은 개인적 경계에서 벗어나 대지와 하나가 되었고,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충만이었으리라. 이는 단순한 육체 노동의 쾌락이 아닌, ‘나’가 사라지고 ‘세계’가 되는 순간의 경이로움이었다. 그의 의식은 개인적 경계에서 넘어섰고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욕망은 사라지고, 그는 세계와 하나 되어 영적 충만을 맛보았다.


종교적 전통에서도 이 경험은 ‘깨달음’ 혹은 ‘구도’의 핵심으로 다뤄진다. 불교와 힌두교의 열반은 고통과 욕망의 소멸을, 기독교는 신과의 합일을 통해 자아를 초월하는 영적 해방을 말한다. 이 수행의 과정은 명상·기도·의식 등 각기 다른 형태를 띠지만, 본질은 같다. 과정 그 자체에서 신성과 합일하고, 무아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화가는 붓질과 물감의 저항감을 느끼며, 작곡가는 음표 사이의 간격과 울림을 감각하며, 학자는 고요한 사색의 순간에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무아지경으로 나아간다. 이때 감각의 활성화는 몰입을 촉진하고, 몰입은 곧 무아의 초월을 가능케 한다. 욕망이 깃든 결과의 허망함 대신, 우리는 창작과 지식의 과정에서 신성한 순간을 마주한다. 창작의 고통을 느낀다면 그 건 몰입이 되지 않아 아직 창작의 때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과정의 기쁨은 결과의 공허를 덮는다.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보다 붓을 든 손끝의 떨림에, 학자는 논문의 한 줄보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의 전율에 몰두한다. 이렇듯 창작과 지식은 인간을 ‘나’라는 고립된 껍질에서 꺼내어, 세계와 융합시키는 매개이다.


최종적으로, 행복은 미래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걸어가는 길 위에 있다. 욕망의 불꽃이 꺼진 그 자리에, 몰입의 불빛이 잔잔히 타오른다. 우리는 그 빛 속에서, 비로소 온전한 자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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