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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와 대중, 연주의 심연

by 신성규

글렌 굴드는 무대를 떠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말년에 더 이상 라이브 연주를 하지 않았고, 스튜디오 안에서 완벽하게 통제된 조건 아래에서만 음악을 만들었다. 많은 이들은 그를 ‘완벽주의자’로 기억하지만, 그의 결단에는 단순한 성향을 넘는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깔려 있었다.


대중은 감동을 느끼기 위해 무대에 오지 않는다.

그들은 실수를 감지하기 위해,

실패를 목격하고 연주자를 ‘인간’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

굴드는 그렇게 보았다.


실수란 음악가에게 있어 하나의 순간일 뿐이지만,

청중에게는 하나의 서사다.

그 서사를 통해 그들은 무대를 내려다보며 우월감을 느끼고,

평가를 내릴 준비를 한다.

이것이 굴드가 연주를 거부한 무대의 심리적 구조였다.


스튜디오에서 그는 자유로웠다.

거기에는 청중의 눈초리도, 경쟁도, 실수의 기대도 없었다.

오직 음 하나하나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예술이 다시 ‘감시’가 아닌 ‘사유’가 될 수 있는 장소.


굴드의 선택은 고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

그는 예술이 관객의 쾌락을 위한 서비스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했고,

완벽이라는 ‘결과’보다

깊이와 성찰이라는 ‘의도’에 무게를 두고자 했다.


오늘날, 굴드의 고집은 더 큰 울림을 가진다.

관객은 더 빨라졌고, 더 즉각적이며, 더 잔인해졌다.

예술가는 이제 창작 이전에,

비평과 조롱의 필터를 먼저 상상해야 한다.


굴드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

이 거대한 감시의 무대에서

“예술가는 누구를 위해 연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첫 번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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