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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침묵

by 신성규

한때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가장 순수한 세계였다. 화가는 캔버스에 자신의 신념을 쏟아냈고, 작곡가는 침묵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세상과 맞서기 위해 예술을 했다. 예술은 감히 돈과 교환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는 단지 예술가의 내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예술가의 고유한 세계를 알아보고 무조건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심미안을 지닌 후원자가 존재했다. 귀족, 교회, 혹은 철학자들. 그들은 예술의 가치가 시장이 아닌 영혼의 깊이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예술은 시장에 편입되었다. ‘좋은 예술’은 ‘잘 팔리는 예술’이 되었고, ‘진실한 창작’은 ‘잘 포장된 콘텐츠’가 되었다. 예술가가 예술가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대중의 입맛에 맞게 각색해야 하고, ‘예술’은 더 이상 영혼의 산물이 아닌, ‘팔 수 있는 기획’이 되었다.


이제 예술은 선택받은 자의 사치가 되었다. 가난한 이는 창작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오롯이 표현하려는 자는 생존과 타협해야 한다. 예술은 또 하나의 계급이자 권력이 되었다.


자본은 말한다.

“너의 감정을 시장에 맞게 번역하라.”

대중은 외친다.

“우리를 감동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사지 않겠다.”


그리고 예술가는 침묵한다. 침묵은 저항일 수도 있고, 절망일 수도 있다. 혹은, 더 이상 ‘팔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고요한 굴복일 수도 있다.


예술은 본디 자유로워야 한다. 그 자유는 경제적 자율성이 보장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의 구조는 그 반대다. 예술의 순수성은 계급적 자본 위에 놓였고, 진짜 예술은 ‘창작의 시간을 살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 되었다.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우리가 놓친 예술의 순수성,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낭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감각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예술을 다시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혹은, 예술은 끝내 시장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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